매거진 짤막하게

004

by 지예강

마른장마. 여름의 역설.

오늘 서울 가장 북쪽까지 다녀온다고 족히 세 시간은 지하철 안에 있었다. 딱 들어맞지는 않았어도 얼추 퇴근 시간 무렵에 하행선을 탔는데, 이름과 직함과 역할을 지워낸 얼굴들에는 고단함만이 드리웠더라. 사실 그 고단함은 이유가 저마다 다를 것이고 그 속에는 피로 외에도 고통, 분노, 슬픔, 후회 따위가 뒤섞여 있을 것인데, 세계는 무너지지 않고 잘도 돌아가고 지하철은 언제나 만원이다. 나 역시 사원증을 호주머니 깊숙이 넣어 놓은 직장인인 양 짐짓 그들과 유대감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사회생활 10년 동안 사원증 따윈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으면서.


그러는 동안에 내일의 계획을 짜 봤다. 일단 비가 세차게 내려야 하고, 집 앞 슈퍼라도 다녀올 듯한 단출한 차림새여야 한다. 기차를 탄다. 평일의 객실은 텅 비어 있다. 과묵한 사람 한 두 명 정도와는 나눠 써도 괜찮다. 비로 얼룩진 차창 너머로, 안개 자욱한 풍경이 내달린다. 신록이 짙고 골이 깊은 산을 한참 가로지르다가, 한순간 시야가 확 트이면서 빗물로 몸집을 불린 거대한 호수나 강이 드러난다. 젖은 공기 때문에 음악은 더 깊고, 매일 하던 생각은 흩날려 사라진다. 목적지는 상관없이, 내키는 때에 내리자. 그래도 그곳에 바다가 있으면 참 좋겠지. 일어나야 할 때를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아늑한 카페가 있으면 더 좋겠고. 뜨거운 커피가 내 몸을 살살 녹여내고, 오랫동안 응어리 진 내 마음의 농도 휘휘 풀어내고. 빗 속에 마구잡이로 싸돌아 다니면서 내 속에 쌓아왔던 것을 바닥에 줄줄 흘리자. 그리고 순도 백 퍼센트 육체적 고단함만을 짊어지고 돌아오자. 집으로 향하는 열차에서는 선잠에 빠진다. 이미 어두워져 창 밖으로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대신 여독 가득해 볼품없는 얼굴만이 비칠 테니까 애써 눈을 감고 꾸벅꾸벅. 과한 에어컨 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 가끔 깨는 건 허용. 그래야 집에 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푹 잘 테니.

여름 추위에 오히려 약한 나는 반드시 감기몸살이나 열병에 걸리리. 냉방병. 여름의 또 다른 역설.


써 놓고 나니 허세가 가득하네. 내일 눈 뜨는 순간 핑곗거리 100개를 속으로 주워섬기며, 그대로 다시 벌러덩 드러누워버릴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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