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영화 <패터슨>을 본 뒤, 작고 얇고 빨간 공책을 장만했다. 패터슨처럼 시를 쓰지는 못했고 대신 정성스럽게 쓴 헛소리들로 페이지를 채웠는데 그중 3월 14일에 쓴 글.
많이 버리고 약간 채우기. 빈 공간을 유지하기. 쌓아놓지 않기.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소각, 휘발, 기화해 버리기. 미련 갖지 말기.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떠올리기 조차 힘들 것임을, 생각하는 수고조차 없을 것임을 일찌감치 깨닫기.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기. 강약과 경중을 따지기. 오롯이 나에게로만 수렴하기. 스스로에 집중하기. 거추장스러움은 벗어버리기. 그래서 온전한 나, 날 것의 나, 솔직한 나를 마주하기. 어렵지만 포기하지 말기. 지치더라도 놓지는 말기. 시간의 힘을 믿기.
구구절절 징글징글 찐득찐득하게 글자로 떠들어댄 반년 전 다짐을 찾아 읽으며,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해내지 못했는가 탄식했다. 서글픈 일이다. 다시 다짐하려고 여기에 옮겨 적고, 6개월 뒤의 나를 또 한 번 믿어보고자 하는 일이.
설익고 서툴러도, 혹은 허름하고 헤졌더라도 창피해하지는 말자. 내가 내건 깃발이든 얼굴과 몸짓에 얼핏 드러난 감정이든 손끝 발끝에 희미하게 남은 어제의 나든 간에. 제발 자기 검열 노노.
몇 평 안 되는 공간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게 지겨워서 밖으로 나왔는데 날이 흐리다. 바깥에 있기에는 태양이 좋고, 안에 있기에는 비가 좋다. 가끔 반대여도 괜찮다. 이왕이면 정도가 강하기를 바란다. 살갗과 아스팔트를 똑같이 지글지글 익히거나, 오물과 잡생각을 한꺼번에 휩쓸어 버리거나. 태양은 몸을 가다듬게 해 주고 비는 마음을 추스르게 해 준다. 나에겐 그렇다.
그런데 오늘처럼 흐린 날은 그냥 흐리멍덩. 집중하지 않고 음악을 듣거나 시를 읽으며 내일의 폭염이나 폭우를 기대해야지. (오늘의 픽 : 음악은 위아더나잇, 시는 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