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짤막하게

009. 소나기, 아노말리사

by 지예강

밤새 집이 몸을 뒤틀었다. '뚝' 뼈가 끊어지는 소리와 '쩍' 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15년 된 건물에도 육감이라는 게 있는지, 마치 어르신들의 무릎 쑤심처럼 소나기를 예견한 거였나 보다.


드러누워 있다가 우르릉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우산을 챙겨 나오니 마침맞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 비는 이렇게 와야지. 도서관 가는 길 풀내음은 청량하고, 자박자박 빗물이 밟히는 느낌은 경쾌했다. 책 몇 권 골라서 카페 통유리창 자리에 앉아 실컷 비 구경이나 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도서관을 나오니 하늘이 개는 거다. 뭐야, 좋다 말았네.


아쉬움을 책 한 권과 영화 한 편으로 달랬다. 책은 김교석 작가의 <아무튼, 계속>. 영화는 찰리 카우프만 감독의 <아노말리사>. 둘 다 끝내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목적지로 정한 건 그 책의 화자(작가)처럼 '일상의 루틴을 통한 항상성 유지'였는데,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은 그 영화 속 남자(마이클 스톤)가 시달리는 '일상에 찌들다 못해 권태로움'에 가까우니.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니지만, 때론 각기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조언, 격려와 위로, 칭찬과 질책이 하나같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긴 그들도 내가 매번 털어놓는 고민과 푸념이 넌더리 나겠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질 테고. 그래도 그렇게 서로를 참아내는 게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임을 알지만, 지친 나는 'anomaly+XX'를 찾기보다는 당분간 방 안에 혼자 있을 테다. 책을 통해 건져 올린 파스칼의 말에 십분 공감하니까.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아노말리사(Anomalisa)는 남자가 여자에게 지어준 이름. 변칙을 뜻하는 Anomaly에 여자의 진짜 이름인 Lisa를 더했다. 그렇게 리사는 마이클에게로 와서 꽃이 되나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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