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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Jul 30. 2019

014. 여름의 민낯

  자발적으로 뭉개져 있다가 예순 시간 만에 각성했다. 머리도 비었고 냉장고도 비어서 뭐라도 채워 넣으려면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어제 정오에 내가 사랑하는 밴드 '위아더나잇'이 '여름의 민낯'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매했는데,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일단 다운로드해놓고 하루 묵혀둔 이 앨범을 나름대로 아껴 듣는다고 위아더나잇 전곡 플레이리스트 속에 슬쩍 묻어 놓았다가, 결국엔 감질나서 이 두 곡만 반복 재생하고 있다. 보컬의 목소리는 세상 레이지한데, 참 열일하면서 곡을 뚝딱뚝딱 내주니 감사하다. 천 번 들어야지.


  하나는 낮에 듣기 좋겠고, 다른 하나는 밤에 듣기 좋겠다. 하나는 여행의 시작에 들으면 좋겠고, 다른 하나는 그 끝에 들으면 좋겠다. 단짠단짠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진 그 곡의 앨범 재킷은 초록과 빨강의 보색이다. 나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에, 고향도 아니고 타향도 아닌 곳을 휘적휘적 헤매면서 음악을 들었다. 한 차례 비가 내리다가 가신 탄천은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매미가 악다구니, 눈 앞에서는 잠자리들이 어쩔 줄 몰라하며 너울댄다. 벤치에 앉아 있으니, 개미 몇 마리가 나무에서 후드득 떨어진다. 그중 하나가 티셔츠 속으로 쏙 들어가서, 내가 내 옷 속을 더듬어 찾아내야 했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침입자는 산 채로 탈출했다. 그동안 지구를 덥히느라 과로사 직전의 태양은 저 너머로 더디게 움직이는데, 제대로 일을 못한 먹구름 떼는 쫓기듯 후다닥 사라진다. 


  병째 냉동실에 넣어놓은 와인은 제법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나온 뒤에도 차가워지지 않았다. 찬물에 샤워하는 걸 싫어하는데 했고, 혼자 술 안마시기로 다짐했지만 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여름의 민낯은 싫고 좋은 것, 해야 되는 것과 아닌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나. 날이 선 겨울과 달리 여름은 무뎌서 좋다. 쿡 찔러도 서럽고 슥 스쳐도 쓰라린 겨울과 달리, 흐물흐물 녹아 한데 온통 뒤섞여 있어서 가치판단과 감정 변별력이 떨어지는 여름이 좋다. 여름의 최선은 그냥 살아 있는 것. 뭘 느끼고 뭘 행하든 상관없이 그냥 저 매미, 저 잠자리, 저 개미들처럼 팔딱팔딱 살아만 있으면 되니 좋다. 와인 때문인지 음악 때문인지 내 손목도 팔딱팔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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