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사람, 방식에 새롭게 적응하는 일은 시간과 품과 감정이 드는 일이라 피곤하다. 조심스럽게 살피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 너무 들떠있거나 너무 가라앉아 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 필요 이상의 질문을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날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 가만가만히 적응해 나가자. 낯섦이 낯익음이 될 때까지 꾸준히 잔잔함을 유지하자. 적당한 습관을 들이자. 몸도 마음도 주변도 간결하게 정돈하자.
죄를 지은 인간에게 신은 "종신토록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땅의 소산을 먹을 것이라"라고 했다는데, 그럼 결국 노동은 벌인 건가. 그 신은 다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한다는데, 그럼 노동하지 않는 삶이 구원의 삶인 건가. 신을 믿지 않는 나지만 요새 종교에 관한 대화를 많이 하는데, 신이니 사단이니 죄니 구원이니 하는 단어들을 주고받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대체 뭐라고 다들 난리인가. 그리고 인간은 대체 왜 그렇게 구원을 받으려고 난리인가.
그냥 궁금해서 '구원'을 검색해 봤다. 두산백과에서 끌어온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 구원은 모든 종교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고 실현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 기독교에서는 죄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 힌두교에서는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 불교는 욕망(또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역시 불교의 구원이 가장 마음에 드네.
금요일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술에 취한 한 남자가 마치 짐승이 낮게 포효하듯 간헐적으로 울부짖었다. 몇몇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고 또 몇몇은 비웃으며 힐끗 쳐다보고 나머지 몇몇은 쑥덕거렸다. 나 역시 여느 때였으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을 텐데, 글쎄, 그 날은 왠지 그 남자가 가엾게 느껴졌다. '으어억', '아아'하는 알 수 없는 웅얼거림 속에서 몇 번이고 '알아', '알아', '알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늘 '모름'을 부끄러워하고 '앎'을 떳떳이 여기는데, 취기에 빌어서야만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알지만 할 수 없거나 하지 못하는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누구나 그런 것이 있지 않나.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그래, 어쩌면 그게 이유인가 보다. 모르면 몰라도, 아니까 맞닥뜨리게 되는 괴로움. 이것이 죄임을, 이것이 무지임을, 이것이 욕망이고 집착임을 알지만 쉽게 어찌할 수 없어서 사람은 종교를 찾는 건지도. 그 남자의 '으어억', '아아', '알아'는 내게 구원을 부르짖는 한 나약한 인간의 기도처럼 느껴졌나 보다.
근데 이게 무슨 의식의 흐름 같은 글인가. 내일 죗값을 치르기 위해 다시 노동의 한 주를 시작하려니 마음이 싱숭생숭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