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크레마 카르타를 구입한 3년 전 여름 이후로 종이책은 사지 않는다. 그 당시 난 가볍고 간결하고 단순한 삶, 즉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던 때였다. 토요일마다 다니던 학원이 종로에 있었는데, 수업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르는 게 수주 동안 하나의 루틴이었다. 어느 토요일에는 크레마 카르타를 구입했고, 그 뒤의 토요일들에는 종이책을 가득 담은 에코백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입장했다. 책을 판 돈은 예치금으로 받아서 전자책 사는 데에 썼다. 종이에 찍힌 활자와 그 종이의 질감과 향, 묶어서 드러난 책등과 책날개, 그립감과 묵직함 등…이 내 독서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의 노선 변경이 만족스러웠다. 아니, 만족 이상으로 좋았다. 아무렇게나 읽고 보관해서 구겨지고 빛바랜 책들을 들어냄으로써 공간이 시원해지고 깔끔해진 것이. 아마 그 책들과 함께 한 포대의 먼지도 딴 데로 옮겨갔으리.
딴 데로 옮겨간 것이 또 있다. 이름들. 좋아하는 작가의 북토크나 강연이나 사인회를 즐겨 쫓아다닌 덕에 속지 첫 장에 작가의 친필 사인을 받은 책이 더러 있었다. 그 사인은 당연히 그 책을 쓴 작가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표식이고, 더불어 '나'라는 사람으로 한정된 독자의 이름과 당시의 날짜가 함께 딸려 있다. 결국 사인본으로 받은 책을 내놓는다는 것은 이름들-나의 이름과 작가의 이름-과 그 두 이름이 만났던 날짜를 함께 내놓는다는 것. 너무 확대해석인가. 어쨌든 나 역시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했을 때 그 책 전 주인의 서명이나 그 책을 선물한 사람이 남긴 편지나 그 책을 읽은 사람의 메모를 왕왕 발견하곤 했었다. 그것들을 읽는 것도 나름의 재미이긴 하지.
3년 전에 뿔뿔이 흩어진 내 이름들은 어디에 가 있나. 갑자기 궁금해진 건 오늘 출근길에 읽은 이기호 작가의 <최미진은 어디로>라는 단편 때문이다. 혹시 내 이름이 쓰인 책이 그 책의 작가에게 가게 된다 하더라도, 부디 곡해하지 마시길. 책을 판 건 작품이 별로여서가 아니라, 단지 한 포대의 먼지를 치우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