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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Aug 10. 2019

019. 환멸

  읽은 문장이 내게 더해지길. 쓴 문장은 나를 덜어내길. 그래서 단단하지만 가벼운 나이길 바란다. 


  하지만 읽는 시기와 읽지 못하는 시기, 쓰는 시기와 쓰지 못하는 시기는 번갈아 찾아오나 참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그래도 요새는 몰입하진 못해도, 조금씩 읽고 또 조금씩 쓰고 있다. 


  어제까지 읽은 책은 『웃는 남자』라는 제목의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리고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어쩌다 보니 제목만 다른 동일한 소설을 연달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웃는 남자」를 읽을 때도 와 닿았던 문장이 「d」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해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저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몇 번이고 더듬어 보고, 전체를 가만히 응시해보기도 하고, 단어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결국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웠다. 책을 덮고 나서도 자꾸 되뇌게 되는, '환멸'. 그 단어가 마치 오랫동안 내가 찾던 말인 것처럼 내 속에 들어와서 비어 있던 어딘가에 꼭 들어맞았다.


  나는 무엇에 환멸을 느끼는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대부분의 것에.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하고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듣는 것에.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당하는 것에. 누군가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에.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과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 하지 않는 것에.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에. 혼자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에. 나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에. 태어나고 살고 병들고 죽는 것에.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데 살지도 못하겠고 죽지도 못하겠는 것에. 환멸. 


  인간관계에서만 보자면. 누군가 그랬다. 상대방과 내가 모두 가지고 있는 동일한 지점에서 바로 마찰이 일어나는 거라고. 제멋대로인 사람과의 사이에서 힘든 이유는 나 역시 제멋대로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거나 그러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제멋대로이면 안 됨'을 스스로 인지하는 사람은 결국 상대방에게도 '제멋대로이면 안 됨'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는 뜻일까. 글쎄, 모르겠다. 어쨌든 난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자기 검열이 유독 심한데(그러나 매번 후회할 말만 지껄이는데), 그래서 말본새가 형편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더 받는 건지도. 

  

  책을 덮고 오도카니 앉아있을 때 문득 떠오른 예를 하나 들자면, 

  "더 시간을 들여서 신경 좀 써줬으면 좋겠다."를 "집에 꿀단지 숨겨놨니?(벌써 가게?)"로,

  "더 고민해서 퀄리티를 높였으면 좋겠다."를 "경력이 몇 년인데.(이 정도밖에 못하니?)"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내가 얼마나 신경 쓰고 고민해서 결국 어떤 퀄리티를 냈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판단했고 어떤 의중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냥 그걸 싸고 있는 말본새. 그 말본새 끝에 매달린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도 슬픔도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말이 뒤집히길 바라며 휴일을 반납하고 작업에 매달리는 동안 계속 그 말본새에 천착할 나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가여움도 억울함도 아니다. 그것은 환멸. 환멸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너무 별 거 아닌가.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어디에도 없고 있다 해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어디 있는지 안다 해도 찾을 방법을 알 길이 없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데, 왜 서로를 또 스스로를 그렇게 대하는지. 과장해서 좋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배배 꼴 필요도 없지 않나. 그냥 서로의 선을 지켜주면서, 서로가 느낄 삶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의미로 약간의 친절을 더해서, 있는 힘껏 힘주지 않은, 그런 무심함. 그게 환멸 앞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환멸로부터 탈출해 향해 갈 곳이 없지만 혹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꾸준히 꾸역꾸역 꾸물꾸물 시도하는 것이 읽고 쓰는 것이다. 문장들이 내게 더해지고 또 나를 덜어내면서 밀도 높지만 하중은 낮은 내가 되면 '환멸'이라는 단어 자체가 액화든 기화든 승화든 그 어떤 상태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르니. 


  어휴, 주말 동안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겠다. 시간 들여 신경 쓰고 고민해서 퀄리티를 높여야 되는 작업을 내내 해야 하니까. 노동해야만 겨우 돌아가는 삶이야 말로 환멸이다. (마지막 문단 때문에 결국 찡찡이 푸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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