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누군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꺼내 들은 솔튼페이퍼의 'Heart Storm'. 갑자기 주저앉아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눈물샘 폐업한 지가 오래되어 실패했다. 그 뒤 불편할 정도로 눈이 뻑뻑했는데, 제 메마름을 각성하고선 주인에게 발악을 하는 모양. 일단 밤새 갖은 꿈속을 헤매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대서 아침에 눈 뜨기가 힘들었고, 그 탓에 오후만 되면 주저앉으려는 눈꺼풀을 일으키느라 버거웠다. 물론 책을 펼쳐도 그냥 글자를 응시할 뿐 이해하지 못했기에, 월요일부터 출퇴근 길을 함께 한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은 사실 안 읽은 것과 진배없다. 모니터 앞에 앉아 한두 시간만 지나도 눈이 가렵고 달아오르는데, 그러다 눈두덩과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견뎌야 하는 두통까지 뒤따랐다. 루테인을 주문해야 하나.
문제의 눈은 내 것만이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 여러 의미가 담긴 그 눈초리에 눈치가 보여서 선글라스라도 구해다 쓰고 싶었다. 피할 이유도 없지만, 이미 어긋나 버린 시선을 마주해봤자 무엇하리. 나의 어떤 점이 그리 못마땅했을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까, 가늠해 보기도 전에 끝났다. 원하는 답을 그렇게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질문을 하다니. 그 답 드립니다. 그만두겠습니다.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의 한 문장인데, 마음에 들어 적어 놓았었다. 난 자유하고 성찰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쁜 공기를 알아챌 정도는 되나 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난 방독면을 쓰고 당장 뛰쳐나가기보다는 좀 더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언제 탈출해야 했을까? 1. 내 경력을 폄하했을 때, 2. 독서량을 물으며 나의 어휘력과 작문능력을 폄하했을 때, 3. 혀를 차고 한숨을 쉬며 나란 사람 자체를 폄하했을 때. 세상에, 써 놓고 보니 이건 젊은 날 자유고 성찰이고 뭐고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나쁜 공기 아닌가.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지진아에게도 이렇게 가혹하진 않을 거다. 물론 내가 과장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걸 수도 있고, 내 업무능력이 기대에 못 미쳐서 그분의 화를 돋운 걸 수도 있지만... 아니, 나에게서 이유를 만들어내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을 지레짐작하지 말자. 그거야 말로 정말 어리석은 일.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자.
울 이유가 없다. 8월은 가고, 9월이 온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이 한낮에도 불기 시작하면, 좋은 것만 보러 다닐 테다. 루테인은 잊자. 가을 당근이나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