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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Nov 13. 2019

030. 악몽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배려와 상황적 고려가 상실된 두 시간의 날 선 대화를 지켜보고자 왕복 네 시간 거리를 다녀왔다. 물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기에 진이 빠졌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프고, 고프고, 졸린 기운이 우르르 쏟아졌다. 밥은 먹고, 약은 먹지 않은 상태로 잠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악을 쓰며 깨어났는데, 꿈속에선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순간 내가 비명처럼 내지른 말은 "죽일 거야."였다. 내 목소리로 듣기엔 너무 생경한 말이어서, 당황스러움에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악몽을 자주 꾸지 않는다. 그러나 악몽을 꿨다면 등장인물을 가늠해볼 수 있다. 악몽의 대부분에 그가 있다. 아니, 그가 나타나는 대부분의 꿈이 악몽이라고 해야 맞을까. 오늘도 마찬가지. (의도치 않게)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그는 울부짖는 내 앞에 서서 애석함에 가까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이 내게 성에 차지 않았다. 회한과 통곡이 없었다.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그가 내게 보여준 마지막 표정도 비슷했다. 전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는 술에 취했고, 기분이 나빠졌으며, 그래서 더 고집스러웠다. 여느 때였다면 그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말투, 표정, 태도에 요령을 부려 나 스스로를 그럴듯하게 눙쳤겠지만, 9월의 나는 그럴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 밤 잠들지 못하고 내내 울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마자 예정보다 빨리,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며 날 배웅하던 그때의 그도 알 터였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란 걸. 칼날이 무뎌졌다고 해도 어제의 상처가 아문 것도 아니며, 오늘 상처를 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멎지 않길래, 감정보다 눈물이 오래간 줄 알았다. 그러나 눈물은 이미 말랐는데 감정의 앙금이 여태 남아, 난 아직 그와 화해하지 못했다. 아직 그에게 먼저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고, 이상하게도 그 역시 날 궁금해하지 않는다. 벌써 두 달. 그 사이 병원에서 그가 내게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뭐라고 답했어야 했을까. 그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것은 힘겹다. 난 그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안 됐었다고 말했다. 아버지, 그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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