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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Nov 14. 2019

031. 겨울비

  어제는 종일 흐리고 비. 


  하루치 할당량을 모두 마무리한 저녁 바쁠 것도 없는 느슨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창가 자리에 앉아 물기로 얼룩덜룩 뭉개진 세상이 약간의 체증으로 느릿느릿 뒤로 물러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볼 때, 그때가 음악을 들을 때. 옛 음악엔 다시 빠지고, 늘 듣던 음악엔 금방 취하고, 새 음악엔 쉽게 유혹된다. 평상시엔 생각도 안 나는, 대놓고 비를 노래한 음악도 괜히. 한동안 내겐 선우정아의 <비 온다>.  


  선우정아가 출연했다고 해서 관심도 없던 예능 '복면가왕'을 찾아본 적이 있다. 거기서 부른 곡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겨울비>. 그 이유는 그 곡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곡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선우정아의 가창력이나 편곡 실력을 떠나서, 그 곡 자체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평가를 180도 뒤집어야 했다. 찾아보니 시나위 4집으로 발표될 때는 1990년, 김종서 2집에 발표될 때는 1993년. 한창 동요(또는 <개똥벌레>)를 들을 나이였네. 모창으로 예능에서 과소비된 탓일까, 제대로 다시 들으니 이렇게 명곡이었나 싶다.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책도, 영화도, 장소도, 사람도 한참 후에 다시 만나면 해묵은 판단과 평가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동은, 짜릿한 쾌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음악은 차치하더라도) 다시 읽고, 다시 관람하고, 다시 가보고, 다시 애써 찾아 연락하는 걸 싫어하는 내 성정상 대부분 "우연히"나 "어쩔 수 없이"에 기대야 하기 때문에. 책 한 권을 백 번 읽었다는 세종대왕님도, 대사를 외울 정도로 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수 십 번 봤다는 어느 예능인도 다 내겐 신기한 사람들이다. 아니, 취향이 확고하고, 제대로 즐길 줄 알고, 애써 소중히 다룰 줄 아는 특별한 사람들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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