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는 10년 전쯤 반년 이상을 함께 살았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피부가 검고 짙고 반짝이는 사람들의 나라에서였다.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일했지만, 가깝지는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는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호불호가 확실했고, 자신의 의사와 생각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자기 관리가 철저했고, 목표하는 바가 분명했다. 술이나 충동적인 감정에 의해서 일이나 관계를 그르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작년 봄 비 오는 날 청계천 커피빈 3층 창가에 마주 앉았을 때에는 반가움보다는 어색함이 더 컸다. 하지만 그 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부쩍 가까워졌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작년부터 지금까지 쓴 일기장 세 권을 톺아보니,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자주 만났더라.
그는 나를 따라 '라이프앤타임', '오존', '설'의 공연을 보러 갔다.
나는 그를 따라 청계천과 한강과 서울숲과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함께 북한산과 안산과 인왕산을 올랐고, 강화도와 무의도를 여행했다.
함께 훠궈와 곱창과 콩국수를 먹었고, 캔맥주를 앞에 두고 몇 시간이고 떠들었다.
난 그가 내어준 짧은 반바지를 입고 그의 침대에서 잠들었고, 그는 내가 내어준 긴 바지를 입고 내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 봄부터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여름, 가을까지 우리가 공유한 것들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난 그에게 솔직했고, 그도 나에게 그랬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드러낸 것이 아니라 감춘 것에 있었다. '목적'. 우리의 관계에서 내게는 없었으나 그에게는 있었던 단어.
돈을 떼먹은 건 아니니 사기라고 하긴 뭣하지만, 떼인 내 감정은 어디서 돌려받나. 피해를 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기고 싹 잊어버려야 할지, 피해를 볼 뻔했으니 대차게 따지기라도 해야 할지. 아니, 엄밀히 말하면 피해를 본 거니까 쫓아가 머리채를 잡아야 하나. 물론, 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오래 소식 없다가 갑자기 연락이 오면 보험이나 정수기나 청첩장인 줄 알았더니. 손아귀에서 줄줄 새는 모래처럼 빠져나갈 것들은 다 빠져나가고, 툭툭 털어보니 손바닥엔 그 흔적만 허상처럼 반짝인다. 1도 올리기가 힘든데, 또 이렇게 타자에 대한 시선의 온도가 10도쯤 떨어지네. 가볍고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