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발 목포행 열차를 탄 오늘 아침, SRT매거진의 제목은 '밀양'이었다. 잠이 급한 탓에 정독은 돌아오는 길로 미뤘는데 그새 제목이 '안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목포에서 광주를 거쳐 익산으로 향하는 어느 지점에, 부지런한 손들이 11월호는 걷어가고 그 자리에 12월호를 채워 넣은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아침만큼 피곤한 밤이어서 12월호도 훑어보는 수준. 그래도 눈에 띈 건 SRT매거진이 이번에 만 3년을 맞았다는 사실. 난 오늘에서야 SRT매거진과의 첫 만남을 가졌는데, 벌써 37호만큼의 히스토리가 있다니. 나에게 고속열차란 늘 KTX였고 그래서 출장길이나 귀향길의 킬링타임을 책임진 건 KTX매거진이었기 때문에, 이 동네 여행잡지의 사정에는 어두웠네. 36호까지의 너의 과거는 모르나, 앞으로 친해지자. 나 이사 왔거든. 좀 되긴 했지만.
먹고사니즘을 위한 업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요 며칠도 출장으로 바빴는데, 지난주엔 충주와 울산을, 어제는 경기도 광주와 충남 아산을, 그리고 오늘은 전라도 세 곳을 찍었다. 내일은 안동에 갔다가 대전으로 향하는 일정이다.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나서 온종일 이동만 하다가 밤늦게야 녹초가 된 상태로 돌아오는 날들이 며칠씩 이어져도 난 늘 괜찮았다. 다행히 그게 내게 거리끼는 일이 아니었던 거다.
업이 아니어도 이곳저곳 많이 다녔는데, 퇴사, 휴직, 휴가 등 자유로운 시간이 보장되면 어디로든 떠났다. 그 여행들의 저변에 깔린 내 마음은 사실 '가고 싶으니 가야겠다'는 권리보다는 '가야만 하니 가야겠다'는 의무 쪽에 더 가까웠는데, 그 의무감이 사라진 지가 꽤 됐다. 특히 올해는 그저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고만 싶었는데.
지난 월요일 <겨울왕국2>를 보고 나서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상영이 끝난 후의 '스타라이브톡' GV를 보고 나서는 북유럽에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제작진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로 답사를 다녀왔다고 하는데, 제니퍼 리 감독의 경우 스토리에 대한 영감을 그 장소들에서 얻었다고 한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엘사)는 보통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평범한 보통의 인간이지만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나감으로써 행복을 쟁취하는 동화적 존재(안나)로 인해 함께 아름다운 결말을 맺을 수 있었다고. 그동안 내가 북유럽에 관심이 있었다면 완전히 그 특유의 풍광 때문이었는데, 갑자기 그 나라들의 신화, 설화, 민담에도 호기심이 솟기 시작했다. 비단 <겨울왕국2>뿐만 아니라 최근에 내게 충격을 준 영화들, <미드소마>나 <경계선>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공동 연출자인 크리스 벅 감독도 답사했던 나라들의 가을 풍경이 무척 인상 깊어서 영화의 계절적 배경을 가을로 설정했다고 한다. 1편이 겨울이고 2편이 가을이면, 3편은 여름인가. 올라프 어쩌라고. (여름을 좋아하는 난, 물론 1편의 베스트곡을 'In Summer'로 꼽는다. 2편은... 뭔가 웨스트라이프스러운 'Lost in the Woods'로 하겠다.)
아, 그러나 오늘은 북유럽보다는 당장의 의무를 생각하자. 내일 안동 가는 첫 차 타려면 지금 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