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JTBC 예능 '트래블러-아르헨티나'를 봤다. 본방을 놓쳐서 재방 편성표를 검색했다. 여행은 이미 예능에서 식상한 소재라, 특별히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냥 아르헨티나에 갔다길래, 출연진들이 평소에 호감 있던 배우들이길래 찾아본 거였다. 첫 화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막 도착한 날의 모습을 담았는데, 기대감 없이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음 중간에 끄고 당근케이크 사 먹으러 나갔을 거다. 대신 개인적인 추억을 소환해 그 공간에 대한 아련함과 애틋함에 기댐으로써 시청에 대한 의지를 지켰는데, 이 말인즉 출연진들이 이과수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는 순간부터는 이 프로그램을 안 볼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빙하보단 사막을 선호한 나에게 아르헨티나 남쪽의 추억은 없으니.
2016년 2월, 그러니까 꼭 4년 전에 아르헨티나에 있었다. 화면 속 눈에 익은 장소들을 보며 새록새록 떠오르는 지난 순간들에 젖어 있을 때, 화면 속 그들은 오래된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더라.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영화의 배경이 라보카 지구인 모양이었다. 마치 방금 보고 나온 영화인 양 장면 하나하나를 끄집어내는 그들의 대화에 괜스레 나 혼자 소외받는 기분이 들어서 얼른 찾아봤는데, 20년도 전에 개봉한 이 영화를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대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을 다시 봐야겠다. <해피 투게더>만큼의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영화는 아니지만, 내가 많이 찬사를 보내는 영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기 전에 한 번, 다녀와서 다시 한 번 봤는데 사실 제목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서울이나 런던, 파리, 뉴욕, 시드니로 바꿔도 크게 문제없다. 모이면 모일 수록 소외되는 그 어떤 대도시의 이름이라면 무엇이든. 그런 의미에서 원제 <Medianeras> (영어 제목으론 <Sidewalls>)가 지구 반 바퀴 돌아 한국에 오면서 로맨틱 코미디스럽게 변형된 것에 대한 여전한 아쉬움.
방송에선 1년 내내 눈이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 다음 날 아침 사람이 거둬들이기만 하면 되는 풍요로운 대지의 먹거리, 낯선 이에게 허물없이 인사하고 느닷없이 노래를 불러 주거나 덥석 춤을 청하는 모습들을 내세우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긍정성을 내세웠지만, 탱고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슬퍼지지 않나. 내가 기억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어둡고 거대한 도시였다. 오늘 우산 없이 폭설을 맞으며 서울 한복판을 걷던 때나, 찐득찐득한 사람들의 살갗이 아무렇지 않게 스치는 플로리다 거리를 걷던 때나 내 속의 기분은 크게 달랐던가. 묘하게 혼재된 것들 사이에 나 역시 뒤섞여 정신없이 걷다 보면 끊임없이 들려오는 "cambio! cambio!". 사설 환전꾼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달러를 사고 페소를 파는 목소리지만, 어쩌면 그 단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정체성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 봐야겠다. 그리고 <해피 투게더>도 꼭 찾아보자. (보진 않았지만, 주인공들이 해피하지도 투게더하지도 않을 것 같네.) 그로 인해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이 더 어두워지더라도. 근데 또 그게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