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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Feb 19. 2020

036. 우정이 식기도 할까

  MBTI 사고형(T)과 감정형(F)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또 얼마나 서로를 오해하고 있는지를 재밌게 풀어놓은 게시글을 보다가, 얼마 전 저녁이 떠올랐다.


  저주받은 2019년이 끝나고 새해가 되자마자 느닷없이 찾아온 내 마음의 소강상태. 생채기가 난 곳엔 새살이 돋고, 쇠약해진 곳엔 부목이 덧대어지면서 천천히 회복 중이다. 시간의 도움이 가장 컸겠지만, 어느 정도는 내 의지였다. 깊은 밤 정체 모를 공포로 벌벌 떨며 어서 잠이 들기를 기다리거나, 커튼으로 해를 가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주룩주룩 눈물을 쏟거나, 내가 내뱉어선 안 됐던 말들이나 들어선 안 됐던 말들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2차3차4차n차 가해를 가하며 피 흘리는 하루이틀사흘나흘억겁이 지나다 보니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난 어디로 가야 하나. 아파트 공사장 꼭대기나 한강대교로? 튼튼한 밧줄을 사러 철물점이나, 차곡차곡 모을 알약을 얻으러 병원으로? 아니, 난 탄천에 갔다.


  요 며칠은 추웠지만 이번 겨울이 비교적 따뜻한 건 운이 좋았다. 거의 매일, 해가 있는 방향으로 한 시간 남짓 걸었다. 새소리, 물소리, 산책가들의 주고받는 말소리, 꽁무니 신난 강아지 발자국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음악 볼륨을 조정해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자박자박. 그리고 돌아오는 길엔 도서관에 들려서 책을 잔뜩 빌렸고, 한나절에 한 권씩 도장깨기 하듯 책을 읽었다. 읽다만 책이 있을 경우에는 무겁게 장을 봐왔다. 잘해 먹었고, 많이 잤다. 좋아하는 걸 하고 싫어하는 걸 피하려고 노력했다. 아픈 짐승은 어쨌든 스스로 낫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모양이다.


  가장 많이 가린 건 사람. 작년 9월부터 현재 진행형 중인 금주를 핑계로 오직 술자리로만 연명해가는 관계는 몽땅 아웃. 함께 시간을 보낸 후의 귀갓길이 이상하게 불쾌했던 관계들도 아웃. 그렇게만 해도 우수수 떨어져 나갔는데, 사실 감나무 까치밥처럼 내 가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조금 무심해졌다. 정말 친한 사이임에도.


  우정이 식기도 할까. 어떤 사건으로 인해 크게 다투고 절교하거나, 서로의 상황이 달라져서 서서히 멀어지는 거 말고, 일순간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사랑이 식듯 우정도 그럴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순간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고 내게 분명 힘과 위로가 되어주었던 말과 행동들이 신물 나기 시작하면, 그건 오로지 나의 변심일 텐데.


  외에는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요즘, 볼꼴 못볼꼴 다 보고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 몇몇에게까지 난 요새 소극적이다. 영원히 혼자 살 것처럼 굴고 있다. 내 멋대로 구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상대방도 알 거란 걸 난 왜 몰랐을까.


  가까이 살아서 더 자주 보는 친구 A를 얼마 전 저녁에 만났다. 다른 듯 비슷한 우리는 만나면 늘 술을 마셨고 마시다 보면 항상 한도를 초과했고 1차에선 같이 웃다가 2차에선 같이 울었고 다음 날 먼저 일어난 사람이 전화를 걸어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며 3차의 기억을 짜 맞춰보곤 했는데, 내가 술을 끊자 1차에선 밥 먹고 2차에선 커피를 마신 뒤 3차(와 다음날의 안부 전화) 없이 집에 가는 루틴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은 달랐다. A는 혼자 술을 마셨고, 둘이 하던 걸 혼자 했다. 울었다. 펑펑 울며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다며.


  사실 우리의 대화는 MBTI 사고형(T)과 감정형(F)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작년에 내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느끼는 공포, 불안, 분노, 억울함, 후회, 수치심, 자기혐오, 무력감 등등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에 대해 A에게 털어놓을 때마다 내가 기대한 건 정답이나 해답이 아니었다. 공감이나 위로면 좋지만, 사실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년 김연수 작가님 강연에서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말은 이거였다.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반대 방향으로 휘젓는 게 아니라 그냥 두는 거라고. (김연수 작가님이 쓴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하지만 A는 날 정말 걱정하고 위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내 마음속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는 비커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왔다. 유리 막대가 아닌 거대한 노를 양손에 들고.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이렇게 하지 마, 저렇게 하지 마. 당시 A의 조언을 완전히 따르진 않았어도 그 말들에 내가 많이 의지한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말들이 내게 피로감을 줬고, 그 피로감이 어느 정도 가신 후에야 A를 만날 마음이 들었다. 눈치 빠른 그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A가 운 이유는 그거였다. 내가 그에게 전화를 하기 전에, 이전과는 다르게, 고민을 하는 것 같다고. 왜일까. 아마도 그건 탈진 상태인 친구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만든 매뉴얼을 손에 쥐어주며 마구 몰아붙인 탓 같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더 버겁게 해서. 아, 난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괜찮다고, 미안해할 일 아니라고, 울지 말라고 하며 달랠 뿐.


  한바탕 눈물이 휩쓸고 지나간 뒤, 하지만 사고형과 감정형의 대화는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운 2020년 2월을 보내고 있는 내게, 내가 보다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A가 권하는 이런저런 것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누적된 피로감. 그로부터 약 2주가 지난 오늘, 사실 연락을 하기 전에 고민했었다. 사소한 행위들이 의무처럼 느껴지면, 그건 우정이 식은 걸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나저나 우정이 식기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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