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딴 곳에서

8. 2009년 00월

잔나비에 대한 기억

by 지예강

동물원에서 본 원숭이는 그저 못생기고 웃기는 짐승일 뿐이었다. 하지만 원숭이와 나 사이에 놓인 쇠창살을 치워버리면, 원숭이만큼 무서운 존재도 없다.


인도는 소도 많고 개도 많고 도마뱀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원숭이가 많다. 원숭이는 인간을 비웃으며 순식간에 (아마 인간이 세웠을) 영장류의 랭킹을 무너뜨리고 만다. 높은 곳에 앉아 만화경처럼 돌아가는 세상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마음이 내키면 불쑥 사바세계로 침범하는 자들. 그리고 다시 나무 위나 지붕 위로 뛰어오를 때 그들의 손에는 구운 옥수수나 바나나, 파파야 같은 것들이 들려 있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여 벌어 들인 것을 원숭이는 재미 삼아 채간다. 협잡꾼에 맞서 싸우라고? 창살 없이 원숭이를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 못 한다. 얼마나 무서운데. 원숭이의 눈이 나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먹던 게 옥수수든 뭐든 상관없이 냅다 던지고 줄행랑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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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를 두고 원숭이와의 눈치 싸움


인도에 몇 개월 머물면서 공물 바치듯 원숭이에게 간식거리를 갖다 바쳤지만, 원숭이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사건은 따로 있었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던 숙소에서 천장에 달린 팬 하나만을 의지한 채 낮잠 타임을 즐기던 어느 날이었다. 다들 외출을 나갔는지 사위는 고요하고, 앞뒤로 열어놓은 창을 통해 넘어오는 시원한 바람. 꿀잠. ...그런데 불현듯 감지되는 이상한 기운. 잠에서 덜 깬 채 반쯤 뜬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위 내 오른발 발치에 조신하게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 (실내에서, 그것도 침대 위에서 원숭이를 만날 줄이야.)


원숭이는 난폭하다. 눈빛도 난폭하고, 손톱도 난폭하고, 이빨도 난폭하다. 원숭이를 쫓아내겠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두 손 두발을 휘둘렀다가 혹여 원숭이가 공격이라도 해 온다면, 그래서 그 이빨이 날 물어뜯고 그 손톱이 날 할퀸다면, 난 아마 원숭이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겠지. 싸워서 이길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깨지 않은 척하기로 했다. 마치 산에서 곰을 만나 죽은 척했던 어느 우화 속 주인공처럼. 그리고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다시 잠들었다. 물론 깨어보니 원숭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매뉴얼과 함께 무시하면 안되는 읽을 거리, 표지판

원숭이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당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태국이었다. 롭부리라는 이름의, 사원이 많은 고대도시였는데, 난 여기가 원숭이 마을로 불리는 줄 몰랐다. 배가 고파서 별생각 없이 세븐일레븐에서 산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으며 걷는데, 길 건너에서 경찰관 두 명이 나에게 무어라 외치는 거다. 당연히 못 알아듣고 어벙하게 서 있으니, 나무 위에 있던 원숭이 떼(중 몇 마리)가 내 머리에서 원스텝, 내 어깨에서 투스텝 하며 뛰어 내려와 내 한 손에 들린 샌드위치와 내 다른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날치기해 간 거다. 비닐봉지 안에는 음료수와 남은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원숭이와의 짧고 강렬했던 스킨십.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랐고, 롭부리에 있는 내내 벌렁거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롭부리의 사원들은 이미 원숭이가 점령한 지 오래였고, 곳곳에 원숭이를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었다. 그야말로 원숭이 소굴이었다. 원숭이 동상이 서 있고 원숭이 먹이까지 파는 걸 보니, 사원 말고 원숭이 구경을 목표로 오는 여행객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흔치 않은 광경이긴 했다. 사람이 뜻을 모아 세우고 사람이 대대로 신성시 여기며 사람이 온 마음 다해 기리는 그곳이, 원숭이에겐 한낱 놀이터가 되어버리는 이율배반의 광경. 어쨌든 원숭이가 없는 롭부리도 좀 궁금하긴 하다. 그때 걔네들 눈치 보느라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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