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자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여행을 많이 했다고 해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데 여행을 많이 할리가 없지 않냐'라고 묻는다면 사실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여행을 숙제하는 기분으로 했다'라고 한다면 그게 대답이 되려나. 물론 숙제를 낸 사람도 나고 푸는 사람도 나다. 왜 그런 숙제를 내고 왜 그걸 푸는지도 모른 채 그냥 떠나는 상황이 한 번 두 번 생기다 보면 여권에 이국의 도장이 쾅쾅 찍혀 있기 마련. ...어쨌든 여행의 경험이 많다고 해서 모두가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으며, 낯선 장소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는 걸 즐기지 않을 수도 있으며, 위험천만한 상황을 용기와 도전으로 맞서는 걸 흔쾌히 여기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남미 여행의 시작은 브라질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남미 여행', '남미 치안'을 검색하면, 여행지로 남미를 선택한 것에 대한 수많은 경고장이 날아든다. 그러다가 '브라질 여행', '브라질 치안'을 검색하면, 경고장에 대한 답장으로 유언장을 써야 되는 건 아닌가 싶은 거다. 유난히 어려운 숙제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떠난 브라질. 하지만 브라질 첫 도시인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해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무언가로부터 위협당하는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도착한 첫날이 특히 심했는데, 날씨마저도 살인적인 더위였다. 게스트하우스 벽에는 귀중품 도난과 같은 범죄에 주의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고, 게스트하우스의 10인실 도미토리는 나 빼고는 모두 건장한 남자. 그래도 남미 첫날이자 브라질 첫날이자 리우데자네이루 첫날을 공포에 떨며 보낼 수는 없었기에 기우를 다 떨쳐 버리고 팡지아수카르를 찾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리우데자네이루의 풍경과 저 멀리 코르코바두 예수상에 감탄하자마자, 바다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른 안개가 구름이 되어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는 거다. 경이로웠지만, 한 편 무섭기도 했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흩뿌리기 시작하니까 불안해졌다. 일몰 보려고 버티다가 거의 마지막 타임의 케이블카를 탔는데, 그때부터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케이블카는 팡지아수카르에서 우르카언덕을 내려가는 중간에서 딱 멈췄다. 앞뒤로 천천히 흔들리는 케이블카는 비와 먹구름과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고,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케이블카에는 (내 기억에는)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나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함께 타고 있던 직원이 무전으로 누군가에게 급하게 연락하고, 기계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작동시키는 동안 난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야 했다. 케이블카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비명횡사일 테니까. 그런 공포는 처음이었는데, 그 공포의 대부분은 떨어지고 부딪힐 때의 '아픔'을 상상하는 데에서 오는 거였다. 아프면 어쩌지? 당연히 아프겠지. 엄청 아프겠지? 죽을 만큼 아픈 것 그 이상이겠지.
우리는 맞으면 아프니까 운다.
굴러 떨어지는 것, 긁히는 것, 찢기는 것, 일하는 것, 추위나 더위 따위가 다 고통스럽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지옥 같은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케이블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겪자마자 우르카언덕에서 또 다른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우산도 없어 비에 쫄딱 젖은 채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는 또 왜 산을 타는 건지. 분명 옆자리 아주머니가 이파네마로 가는 버스가 맞다고 했는데, 왜 바다는 안 보이나. 버스 승객은 어느 순간부터 나 혼자. GPS와 구글맵과 칠흑 같은 창밖 풍경을 가늠해가며 침착을 유지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허벌판에서 멈춰 선 버스. 그리고 버스기사 아저씨가 포르투갈어로 고함을 치며 내리라는 제스처.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와 사람 소리를 더듬어 그나마 밝은 데로 나오고 나서 겨우 잡은 택시. 그리고 그 안에서 떠오르는 온갖 괴담들.
다행히 또 다른 괴담의 주인공이 되진 않았고, 밤 9시가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곤죽이 된 채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10인실 도미토리에 다른 여자 여행자 한 명이 들어온 건 정말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는데, 밤에는 살인적인 추위 때문에 밤잠 설쳤다. 더위 많이 타는 사람과 방을 쓰면 살을 에는 에어컨 바람쯤은 견뎌야 한다. 난 그 밤,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 맞는 그 밤에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고민하다 잠들다 깨다를 반복했다. 이런 걸 감내할 만큼 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