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딴 곳에서

9. 2013년 8월

심심함과의 상관관계

by 지예강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또는 젊은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너무나 서툴러서 태연하게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 감당해야 한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당장 여행을 포기하는 수밖에. 물론 예외는 있다. 잘 짜인 패키지 관광을 떠나는 방법도 있지만, 이쯤에서 왜 효도관광은 예외 없이 패키지로 떠나는 것인지 알겠지. 여행은 그렇다 치고, 그게 인생이라면 어떨까? 서투른 자신을 보는 게 싫다고 패키지 인생을 선택한다면?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인생을 여행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십분 공감한다. 특히 여행을 대하는 태도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유사함을 느낄 때 더욱. 앞서 어느 글에 썼다시피, 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불가항력에 의해 여행을 반복하고 지속한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만 꽤나 열심히 하는 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현인들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내게 와 닿는 것은 "인생은 고(苦)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로병사를 겪고 온갖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나 열심히 사는 거다. 권리보다는 의무에 무게를 두고 책임감을 우선으로 여기는 수동적인 자세.


여행을 열심히 한다는 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지런 떠는 사람임에는 확실하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같이 일어나 도움닫기 하듯 밖으로 튕겨나간다. 박물관도 동물원도 공원도 식당도 가게도 문을 열지 않은 시각에 휑뎅그렁한 거리에 서 있을 때. 그리고 비행기, 버스, 기차, 사람과의 약속 시간에 필요 이상으로 서둘러서 홀로 겸연쩍게 되었을 때. 그때가 심심할 때다. 바쁘게 여행하는 사람은 그 바쁨 때문에 시간이 비고 심심해진다. 어쩔 수 없지. 가방이나 주머니에 슬쩍 담아온 책이나 음악을 꺼내야지.


누구나 음악을 좋아하고 누구나 책을 좋아한다. 난 듣지 않고 읽지 않더라도 어디든 책과 음악을 소지하는 편인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이 친구들만 한 감동과 위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음악과 구절은 특정 시간과 장소를 기억나게 한다. 반대로 어떤 시간과 장소를 떠올리면 저절로 그 음악을 흥얼거리거나 그 책을 다시 찾아보고 싶기도 하고. (얼마 전에 시드니에서 머물던 게스트하우스가 불현듯 떠올랐는데, 그때 MP3 플레이어에 담아 즐겨 들었던 노래를 찾느라고 며칠 고생했다. 정답은 India Arie의 Talk to her, Dave Holister의 Real Talk. 또 잊어버릴 듯하니 기록해 놔야지.)


어떤 멜로디나 어떤 문구가 불러온 순간이 여행의 순간이라면 십중팔구 그 순간은 심심하던 순간이다. 심심해서 꺼내본 책과 음악이 가벼운 충격이 되어 내 몸속 깊숙한 어딘가에 아로새겨져 있다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불쑥 나타나 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흐르는 거다. 그런데 대개는 음악이 매개체인데, 책을 꺼내는 것보단 음악을 꺼내는 게 손쉬웠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대로 내킬 때 꺼내는 게 음악이라면, 침대 맡이나 이동 중인 기차 안에서나 꺼내게 되는 게 책이니까.)


홍콩은 조금 달랐다. 홍콩에서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책을 읽었는지는 분명히 기억한다. 이미 한 번 읽은 책이었는데, 어디선가 증정품으로 그 책의 미니북을 가지게 되었다. 작고 가볍고 여행 중 읽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가져 간 그 책.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


주인공은 책인데 포커스 나갔네

이 샛노랗고 심플한 책의 표지를 떠올리면 저절로 따라오는 풍경이 있다. 옹핑 빌리지에서 가까운 선착장에서 홍콩섬으로 들어가는 퍼스트 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에 면한 계단에 걸터앉 이 책을 읽었는데, 홍콩에 머물던 5일 내내 비가 내리고 흐리던 것과는 아주 예외적으로 그때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은 새파랗고 바닷바람은 적당히 시원하고 파도소리는 경쾌하고 -여행과 책을 사랑하는 작가의 페이지는 마음을 동하게 하네.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읽은 문장엔 괜히 왈칵.


"생을 마친 후 만약 신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는 나를 가혹하게 평가할 것인가. 아니면 삶에 지친 나를 가엾이 여겨 쉬게 해 줄 것인가."


삶에 대한 애정 없음을 가혹히 여기기보다는, 그래도 열심히 살았음을 가엾이 여겨주기를. 여행을 마치면 그 여독을 풀기 위해 쉬어야 하잖아요.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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