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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쌤 Dec 29. 2023

덩치 큰 사십 대를 짊어지고 가는 여정.

'나'로 살아내기를..

다사다난한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내 인생은 굴곡이 없이 그저 큰 성공도 큰 역경도 없이 평탄하게 흘러간다 생각했었다. 김미경 강사님이 40대는 가장 덩어리가 큰 나이라고 하더니, 그 말을 실감하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큰 결심을 했던 스무여섯. 대학 졸업 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제대로 경험도 해보지 않고 결혼을 결심했다. 연애를 내가 한건 분명하지만,  내 결심이었는지 주변의 결심이었는지도 잘 모른 채, 이 사람과 내가 잘 맞아 잘 살 수 있을지 재보지도 않은 채, 몰랐기에 용감한 결심을 했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는 그때부터였는데, 그 안전한 학교라는 제도는 더 이상 없었다. 결혼이라는 게 뭔지,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던 엄마가 된다는 건 뭔지, 부부의 문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 건지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는 큰 문제들을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며 그렇게 지나왔다.


그 어설픈 시간들을 지나고, 큰 아이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이 아이를 키우며 나는 수많은 감정들을 경험한다. 아이를 통해, 어른이 된 내가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바라보기도 하고, 내가 낳아서 내 분신인 줄 알았던 아이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과정을 보며 너무 아프기도 했고, 아픈 만큼 성숙도 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자식일이라고, 우리 엄마들은 모두 입을 모은다. 아가였을 때, 덜렁대는 내가 실수라도 해도 아가를 다치게 할까, 아프게 할까 노심초사였다. 지 발로 걷고 뛰고 먹고 말하고 생각까지 다해줄 만큼 크면 그때는 얼마나 내 몸이 편안해질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고등 입학을 앞둔 내 주위 많은 엄마들을 보면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간다.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해서 힘든 게 아니라, 뭘 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는 채로, 위태롭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를 바라보고 서 있어야 하는 게 몇 배는 힘이 드는 것이다.


자식이 주는 기쁨과 아픔의 크기는 세상 어떤 감정에 비하기가 어려울 거 같다. 지금껏 내가 겪어본 바로는 그렇다.


나의 사십 대가 무거운 이유도, 자식이 8할일 것이다. 꼭  자식이 문제를 안겨주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든 삶의 결정 속에 아이 셋이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아이는 특히나 처음이기에, 모든 첫 감정을 내게 선물하는 특별한 존재였으며, 진행형이다.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큰 일 앞에,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고 오랜 고민을 했다.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아이의 인생, 지켜보는 게 힘들었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에 기다렸고, 선택했고, 나아가고 있다. 욕심 없던 아이가 처음으로 욕심도 내고 열정도 보이고 긴장도 하고 최선을 다하기도 하고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리고 좋은 결과에 그 어느 때보다 기뻐하고 환호했다. 내가 오래 잊을 수 없을 거 같은 아이의 감정이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또 첫 감정 또한 특별했다.



엄마로 살아 고비고비길. 내 인생보다는 내 기쁨보다는 자식이 먼저였고, 자식을 위해 참을 것들을 참고 인내할 것들을 인내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로만은 살아갈 수 없는 한 나약한 인간이기에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순간순간은 자식보다 나를 생각하는 선택들을 하기도 한다.


어제 충격적인 기사를 보며 화가 났다. 그 또한 연예인이기 이전에 한 나약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그의  잘못의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약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켜주지 않은 것에 너무 화가 났다. 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 하나 모든 말과 행동들에 결점 하나 없을 인간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지 묻고 싶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가 아니라, 나였더라도 그랬을 거라고 당신을 이해한다고, 이제 더는 괴롭지 말고 편안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이기 이전에, 엄마가 되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강해져야 하는 이유도 모르고 살았던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견디는 삶이 고된 순간순간들에 그의 죽음이 이해되었고, 슬프고 안타까웠다.



길게도 하는 마흔 앓이다. 벌써 2,3년째 많은 문제들 앞에 서서 나의 이 무거운 사십 대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중이다. 이 고민과 과정들 끝에는 어떤 결론에 닿더라도 후회가 덜 하기를, 남은 삶에 대한 흔들림이 덜 하기를 바라며..

'엄마'로서의 삶에서 '나'로의 삶에 조금씩 초점을 옮겨가 보기로, 지난하더라도 다시 되돌아가지는 않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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