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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쌤 Oct 27. 2022

당신의 마흔은 안녕하십니까?

기다렸던 마흔의 배신.

나의 마흔은 지독히 외로웠다. 삼십 대 내내 마흔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마흔이 되면 내 고단한 삶이 좀 나아질 거라 기대했는데, 마흔의 배신이었다.


외면하고 살던 삼십 대가 더 나았다 싶을 만큼, 깨달아버린 마흔은 우산 없이 폭우 속을 걷는 나날이었다. 공자는 마흔을 불혹이라 했다던데, 나는 도대체 무엇이 잘 못 된 걸까.


마흔이 되면 몸이 여기저기 아프니 운동도 미리미리 하면서 몸을 챙기라 했다. 그런데 나는 몸이 아니라 마음을 앓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면 약이라도 먹을 텐데,  원인도 불분명한 이 마음앓이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마흔. 남편은 마흔셋, 큰 딸은 5학년, 남매 둥이는 1학년이 되었다. 더 이상 미취학 자녀가 없 그 2020년을 그래서 나는 그렇게 기다렸던 거 같다. 그러면 세 아이를 키우는 나의 삶이 조금은 여유로워지리라 믿었던 거다.


큰아이의 두 돌, 서른 살에 육아를 위해 그만둔 직장생활이었다. 아이를 맡아 키워주시던 시어머님이 너무 힘들어하셨다. 친정엄마에게도 맡길 상황이 아니었다. 남에게 맡길 수도 없는 나였기에 선택은 하나였다. 마지막 퇴근길, 그 광화문의 차가운 바람 냄새 아직 기억다. 많은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고 사는 나에게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한 장면인가 보다.


그리고 10년, 치열하게 육아했다. 큰 아이 4살에 남매 쌍둥이가 태어났다. 큰 딸아이는 뭐든 빠르고 순한 아이였다. 아이와의 매일이 설렜다. 육아는 엄마가 즐거워야 한다는 소리를 우아하게 내뱉던 외동딸 엄마의 오만은 쌍둥이 육아로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내가 참는 것이 편하고, 폐를 끼치는 것이 죽도록 싫은 k-장녀다. 남편은 회사에서 한창 몸 바쳐 일해야 하는 직급이었고 회식과 야근을 밥 먹듯 했다. 그렇다고 양가 부모님께 죽는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나만 참고 견디면 될 일이었다. 바람이 매서워지던 어느 날, 백일도 안 된 쌍둥이를 겨우 워놓고 큰 아이 유치원 버스 내리는 곳으로 전력 질주했다. 큰 아이를 낚아채듯 데리고 뛰어 들어오두 아이는 목청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세 아이 끌어안고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하며 같이 우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 그런 것조차 나에게는 사치였다. 이제와서야 베란다를 바라보며 내가 사라지는 거 말고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무력감에 울던 내가 아팠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밝았다. 우울감, 무력감 따위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가면을 두껍게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나의 우울과 무력감이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나 자신조차 속여야 했다. 견디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책 읽기였다. 육아서를 백여 권은 읽었을 거다. 모범 답안인 육아서 앞에 나는 늘 작아졌지만, 그래도 책을 읽고 나면 하루, 이틀쯤 우울을 감추고 밝게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틸 수 있었다.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읽고, 또다시 읽었다.


힘들수록 더욱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대충 말고 잘 키우고 싶었다. 이렇게 내 모든 걸 바쳐 키우는데 아이들이 대충 크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세 아이 모두 세 돌까지는 어린이집 몇 시간도 보내지 않았고, 그 셋을 끌고 도서관은 세 군데씩 다니며 책을 빌려댔고, 엄마표로 영어를 하겠다며 날밤 새며 자료를 찾아 읽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으로 돌아다니며 책을 사들였다. 또 시간이 나면 계속 배우고 공부했다. 조금 더 시간이 나길래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간이 나면 내 마음이 보일까 두려운 나의 방어기제였을까.



그렇게 십 년만 살죽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다 태우기만 하고 채우지는 않았는지, 미련했다. 남편에게 지혜롭게 도움을 요청할 방법 따위도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기 바빴다.



그렇게 살아낸 삼십 대를 지나고, 만난 마흔이었다. 내 분신 같던 큰 아이에게는 사춘기라는 무서운 놈이 들이닥쳤고, 코로나도 터졌다.


휴...

나는 뭘까? 단단해졌다고 믿었던 내 저 깊은 곳에 내면 아이는 연약하고 자라지 않은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편견 없이 세상을 본다고 믿었던 나는 단단하고 높은 잣대로 나 자신을 꽁꽁 묶고 있었다. 사실 나는 겁쟁이였다. 그걸 40년을 모르고 외면하고 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외면밖에 답이 없었다.


곧 끝나리라 믿었던 나의 마흔 앓이는 마흔둘이 끝나가는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들볶다 암 수술도 받았다. 흔한 갑상선암이지만 암은 암이다. 이제는 치열하게 아이들 말고 나를 키우며 살 거다. 내 마음을 돌볼 참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자기 계발서나 육아서는 읽지 않는다. 2년 동안 <토지>도 읽고, 고전도 열심히 읽어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위로를 받고 해답을 찾아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래라저래라 정답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냥 이런 삶, 저런 삶 속에서 나를 만나고 스스로 위로한다.


세상에 나만 아픈 줄 알았다. 그런데 더 이상 내 아픔을 외면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나니 주변에 아픈 사람들도 보인다. 많은 엄마들이 나와 비슷하게 아프면서 아픈 줄도 모르고 왜 아픈 줄도 모른다. 아이들 키워내는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내 아픔이 위로의 이야기가 되고 내 깨달음으로 누군가를 어루만질 수 있다면, 나의 사십 대는 그리 살아내고 싶다. 내가 읽고 쓰면서 알아차리고 치유되어 가듯이 많은 그녀들도 그런 방법들을 찾아냈으면 좋겠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얼떨떨한데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11살밖에 안 된 내 막내지만, 종종 내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는 녀석. 브런치가 뭔지도 모르는 놈한테, 아직 암 수술 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쉰 목소리로도 기쁜 나의 마음이 전해졌나 보다. 물이 왜 나니..주책이다. 나는 요즘 처음으로 일삼아 쉬는 날들을 보낸다. 제발 좀 더 가만히 있으라고 목소리가 빨리 돌아오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읽고 쓰는게 유일한 즐거움이다. 아! 나의 식물들도..♡

그래서 브런치 합격 소식이 더 눈물나게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낀 세대이다. 인내가 미덕인 우리의 엄마들에게 키워졌고, 자기표현이 정확하고 자유로운 우리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무엇이 옳은지 헷갈린 채 마음을 앓는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고 만다. 한참을 헤매다 이제 겨우 그런 나를 인지했다. 그래서 그렇게 헤매는 그녀들이 있다면, 나의 비루하지만 솔직한 글을 통해 함께 치유하고 싶다.


책 속의 인물들을 통해,  이제 막 정 주고 키우기 시작한 식물들을 통해, 초딩이 둘, 중딩이 하나, 세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통해, 마흔두 살이나 먹도록 자라지 못한 나의 내면 아이를 찾아 성장시켜 나가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께 치유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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