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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쌤 Nov 03. 2022

나를 일으켜 세우는 글쓰기

암 수술로 멈춰 선 시간 안에서..


8.23. 처서(處暑).

더위가 멈춘다는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

처서를 지나니 정말로 더위가 자리를 내어는 세상의 이치가 참 신기했다. 물러나는 더위와 다가오는 서늘함이 만난 듯한 저녁 하늘이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 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도 나지 않았다. 남은 일들을 최선을 다해 마무리했다.



9.2
3일 뒤가 입원이니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일도 마무리했으니, 집안을 살펴야 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아이들 긴 옷도 꺼내 정리해 놓았고, 혹시 빨래가 밀려 속옷이 부족할까 아이들 속옷이랑 양말도 더 사 빨아서 정리해 놓았고, 냉장고 정리도 했다.


그리고 내 짐도 쌌다. 책 3권, 노트, 물티슈, 화장지, 수건, 세면도구, 속옷, 목베개, 에어 팟, 텀블러... 한 짐이다. 엄마가 된 뒤로 처음으로 오롯이 나만 생각해도 되는, 그래 보려 하는 시간들에 대한 준비다. 소풍 가듯이.


큰 아이가 중2, 작은 아이들이 (남매 쌍둥이) 초4.

다 컸다면 컸고, 또 어리다면 어린 나의 삼 남매.

이 아이들을 놓고 혼자 4,5일을 집을 떠나본 적이 없었으니, 처음 떠나는 첫 소풍이 병원행이 되어버린 거다. 아이들을 두고 늦게까지 놀아본 기억도 거의 없는 나의 삼십 대는 그렇게 육아로 시작해 육아로 끝이 났다.  


지난밤 꿈에는, 차디찬 병실 바닥에 내가 누워있었다. 그리고 마취가 되어가는 그 찰나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느린 사진처럼 또렷 느껴졌다. 며칠 전 꿈에서는 누군가 죽었고, 또 누군가가 다쳤다.


주변에 갑상선암으로 수술한 사람 한 둘쯤은 다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케이스이지만, 직접 겪는 사람들 이렇게 나처럼 수술을 앞두고 수만 가지 걱정과 불안을 겪어냈을 것이며, 몇 시간의 두려운 수술과 힘겨운 회복 과정들을 겪어을 것이다. 잠 못 드는 며칠 밤을 보냈다.


9.4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신신당부를 하고 남편과 집을 나오며 세 아이를 돌아가며 안아주고 나오는데, 쌍둥이는 울고, 큰 딸과 나는 꿀꺽 눈물을 삼켰다. 이틀 동안 온갖 이불 빨래까지 하느라 세탁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갔으나 다섯 식구 빨래 바구니는 돌아서면 찼고,  간식거리를 비롯한 먹거리를 채운 냉장고는 돌아서면 비워졌다. 또 필요한 것들을 새벽 배송으로 시켜놓고 나왔는데, 나 없는 동안 애들의 먹거리는 여전히 걱정다.


"미안하다. 조금 보냈으니 맛있는 거 사 먹어라. "

코로나로 어차피 보호자는 1인만 상주할 수 있지만, 내 엄마, 아빠는 못 와봐서 어쩌냐며 내 미안해하셨다. 남편과 밥을 먹던 자리에서 받은 엄마 문자에, 짬뽕에  눈물을 섞어 삼켜야 했다. 자식이 아파서 걱정 끼쳐드리는 것도, 여러모로 도움 못 되는 것도 그저 죄송하기만 한데,  엄마는 남편에게 잘 부탁한다며 또 미안하다셨다. "아 엄마 왜 이래 정말.." 하면서 나는 또 울었다. 남편 앞에서 언젠가부터 잘 울지 않는 나이기에 우는 내 모습에 남편은 당황했다.




9.5. 수술 날.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뜻이요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며,

이가 시린 것은
연한 음식 먹고 소화불량 없게 하려 함이고,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이며,

정신이 깜박거리는 것은
지나온 모든 세월을 모두 기억하면 정신이 너무
괴로울 테니 좋은 기억,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하라는 것이다.
                                                  <목민심서 중>


제 아무리 용가리 통뼈라도 피해 갈 수 없이 모두가 겪는 나이 듦의 현상들이 다 세상의 진리고, 뜻이 있어 그런 거란다. 이렇게 온 우주의 일들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구나, 처서의 저녁 하늘처럼 세상은 그렇게 법칙이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  인생의 굽이굽이 길에 만나는 큰 사건들도 어쩌면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술이 예정보다 일찍 시작됐고, 아이들 챙기고 아침에 오라고 집에 보낸 남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혼자 수술실로 향했다. 덤덤했다. 차가운 수술실에 누웠고,

" 마취하겠습니다" 소리와 함께 감은 눈은 입원실 침대에서 다시 떴다.


이틀 정도 남편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 이후는 혼자 지냈다. 목소리가 안 나올 뿐 다 혼자 할 수 있었기에,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해주는 것이 더 편했다. 그렇게 입을 닫고 지내는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울렁거림도 가시고, 편안해졌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정말 목에 연결된 피주머니만 아니면 소풍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작년이기만 했더라도, 아이들 걱정에 안절부절 동동 거렸을 나였을 텐데, 그렇게 걱정되지 않았다. 하루정도 엄마 없이 잠 못 들어 힘들어하던 쌍둥이도 이틀째부터는 잘 자고 있다 했다. 시어머님도 다녀가셨고, 아이들끼리 화장실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했다.


아이들의 온 세상인 줄 알았던 나였는데,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는 가족들이 안심이 되었다.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멈추는 것이라 했다. 섣부르게 방향을 틀거나 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바로 스톱!! 이란다.


그렇게 암 수술과 함께 마흔 살부터 휘청휘청 헤매던 길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수술 후 아직 두 달이 지나지 않았고, 목소리가 돌아온 지 삼일쯤 되었다. 요즘 쉬는 게 일인 나의 시간은 내 기억 속의 시간들 중에 가장 느리게 가고 있다. 일주일 전의 일이 한 달쯤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안에 살다 보니 내 마음을 보지 않으래야 그럴 수가 없다. 자라지 못하고 있던 나의 내면 아이도 보이고, 내가 하고 싶던 일들도 하나 둘 찾아내고 있다. 멈춰 선 시간 중에 브런치 작가가 된 것은, 꿈 중에 하나인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꿈에 용기도 주었고, 활력도 주고 있다.


잔잔한 호숫가에 작은 나룻배를 타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줄 알았는데, 나는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항해사의 명령에 따라 선박의 방향을 바꾸는 조타수가 아니라, 내 결정에 따라 항해하고 싶은 내 배의 선장으로 나는 살아가고 싶은 것 같다.


발전보다 을 추구하고,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나의 오랜 타성을 깨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걸 안다. 작은 일렁임에 주춤거리기도 할 나라는 것도 안다. 그랬던 오늘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를 쓴다.


주저앉지 말자고.

지금이 아니면 정말 더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살고 싶은 삶을 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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