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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쌤 Oct 27. 2022

아이와의 심리적 탯줄을 끊는 방법

<삶의 한가운데>에서 찾은 인생의 곁길에 대해..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했다.


수년 동안 그 말이 나를 짓눌렀으며, 동시에 나를 살게 했다. 힘들다고, 대충 좀 살고 싶다고, 나도 가끔 좀 쉬고 싶다고, 내 마음의 외침을 누르는 돌덩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리라는 버팀목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로만 강요하는 엄마는 아니라고, 내가 노력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는 엄마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위안했었다.


완벽한 엄마여야 한다는 강박, 정도로만 걸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내 감정들은 모두 뒷전이었다. 돌보지 않았고, 방치했다.



루이제 저의 <삶의 한가운데>는 자유롭게 살아낸 여성 '니나'의 삶을 이야기한다. 출간 당시 '니나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니나의 모습을 설명하라 하면 어떤 게 진짜 그녀 모습일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안락사에 강렬히 반대했으나, 이혼한 전 남편이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슈타인 박사에게 독약을 부탁하기도 했다.


남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녀는 어찌 보면 주체적이고 감정에 충실해 보이면서도, 사랑하지도 않는 퍼시할과의 결혼을 피할 수 없었다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 안에 있는 여러 모습 중에 어떤 한 모습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았으며, 그 모든 모습이 자기 자신이었음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순간들도 지나고,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안간힘을 쓰며 삶의 한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용기 없는 나에게 대리만족을 주기도 했다.


니나를 사랑한 슈타인 박사.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인생의 곁길이란 없는 듯이 정도(正道)로만 살아온 그는 니나를 자신 옆에 결혼이라는 틀로 묶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삶의 정도나 곁길 같은 것은 애초에 정해놓지 않고 그저 자기의 길을 가는 진정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언급되었던 [인생의 곁길]이라는 구절에 매료되었다. 인생의 곁길.. 내 인생의 곁길..




2년 전춘기가 찾아온 큰 아이에게 내 말이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무력감이 바닥을 쳤을 때, 그 바닥에서 본 것은 놀랍게도 상처 입은 나였다. 십 년도 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절들이었다.


말로만 떠들어댔던,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그 말 무슨 말인지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로소 깨달았다.


나와 아이는 내게 한 몸이었다. 그러니 내가 억지로라도 완벽해야 했다. 내 인생에 실패 실수란 없어야 했다. 정도만이 내가 갈 길이며, 길 같은 건 내 인생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 상처를 들춰보는 일은 괴로웠다. 힘들여 나는 나를 보듬기 시작하고, 나를 바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완벽하지 못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강박을 어렵게 하나씩 내려놓다 보니, 아이와 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간사하게도..


완벽하지 않은 나를 닮지 않기를.. 

엄마가 완벽하지 않은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어도 흔들리지 말고 너의 길을 씩씩하게 가기를...

그렇게 비겁하지만 다행스럽게 아이를 진심으로 놓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원망스러워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던 때, 처음으로 친정 엄마에게 나의 힘듦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이와 내가 한 몸이듯이 내 엄마도 내 아픔을 견디기 힘드실 거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그간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엄마에게 할 수가 없었던 거다.


내 이야기를 한참 들으신 엄마는 내 생각만큼 동요하지 않으셨다. 속상해하셨지만 나와 함께 침몰할 거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게 너무 다행이었다. 네 인생이니 네가 결정하는 거지만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니 모든 결정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조금은 처럼 덤덤히 이야기하셨다.


그때 알았다. 내가 그토록 끊지 못했던 아이들과의 심리적 탯줄을 끊어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내 친정 엄마와 나는 그것이 잘 끊기고 아물었기에, 엄마의 결점이 나의 결점이 아니며, 나의 아픔이 엄마의 아픔은 아닌 거다. 그걸 깨닫고 난 후, 나는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아픔과 속상함 들을.


내 아이들에게 나도 그런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이 강요하지도 않은 내 완벽함을 지키려는 과한 노력들 대신, 이제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 나로 살아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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