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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쌤 Oct 29. 2022

자식 교육 말고 내 행복에 목숨을 걸어보자.

배우지 못했으나  가르쳐야 할 <행복하게 사는 방법>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부서지고 사라질 운명이다. 언젠가는 마지막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것이 온전한 형태로 우리 곁을 지킬 때 후회 없이 누려야 한다. 만약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곧 저물고 끝맺는 과정이 이어질 것을 예감하고 마땅히 이별의 채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제로 그것을 맞닥뜨렸을 때 지나치게 섭섭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고 어른답게 헤어질 수 있다. 그 대상은 사람일 수도, 물건일 수도, 일상일 수도,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부디 반복과 변화 속에 나타나는 작은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감성과 통찰력을 갖추기를 바란다.

이 책에 나오는 한 부분이다. 나의 통찰에 도움을 준 책이다.


반복과 변화 속에 나타나는 작은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감성과 통찰력. 내가 바로 간절히 갖추고 싶은 것이다. 나의 남은 생을 잘 살아내기 위해 찾아낸 방법 중에 하나이고, 그걸 위해 애쓰는 중이다.



지금은 중2 막바지인 큰 딸아이가 초등학생 시절 엄마표 교육에 한창 빠져있었다. 독서로 쌓은 문해력으로 자기 주도 학습을 할 수 있는 아이로 만들어 엄마표가 아아이표 학습이 되도록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 최종의 목표였다. 좌충우돌, 아직 자라는 아이에게 성공이다, 실패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성과를 떠나 자기 주도는 어느 정도 가능한 아이로 자라고 있다. 물론, 후회스러운 일도, 깨달은 것도 많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이 이야기도 할 이야기가 태산이지만,  차치하고 오늘은  책을 통해 느낀 아이들에게 우리가 진정 주어야 할 것, 바로 내가 행복하게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지금 그렇지 못한 이유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 부모들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황폐화된 세상에서 모두 다 같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먹고사는 일에 바빴다. 사회를 재건하겠다는 거창한 사명 의식이 아니더라도,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그 각고의 노력들이 모여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행복하게 잘 사는 일 따위를 교육받은 적이 없는 그 세대에게 길러진 우리다. 그 세대는 우리 사회에서 마지막으로 전쟁과 굶주림을 경험했으며, 마지막으로 부모를 책임지고 살아내는 세대라 한다. 내 부모를 비롯한 그분들의 노고에 늘 가슴 아리도록 감사하다. 그들도 배우지 못한, 습득할 여력이 없던, 그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원망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배운 적 없어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보여줘야 할 일이기에 우리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그렇게 먹고사는 일이 바빠, 우리 교육에 우리만큼 목매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너나 할 것 없이 자식 교육에 내 모든 걸 거는 것일까. 방법의 차이일 뿐, 나도 그렇게 아이를 내 기준과 틀에 맞춰놓으려는 일에 목을 매던 시기를 지나왔기에 그 마음을 충분히 너무나 이해한다. 그러는 이유도 안다. 불안감 때문이다. 멀리 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다 나쁜 건 아니다. 미래를 준비하게 할 힘을 길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과해지며 현재를 왜곡하게 되고, 그 왜곡은 나와 주변을 갉아먹으며 내 안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 낸 좋은 엄마의 틀 때문인 것 같다. 워킹맘이든 전업맘이든 자식 교육에 게을리 한 엄마는 죄인이 된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놀이터에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이맘때쯤 어떤 학원을 보내고 어떤 책을 읽힐지 등의 일에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한 엄마는 그런 일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댄스 영상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간 오전 시간에 댄스를 배우러 다닌다고 했다. 좀 별나게 그 엄마를 바라봤었다.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인 거다. 아이를 제대로 안 먹이거나 방치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를 교육시키고 잘 키우는 일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더 관심이 있는 엄마는 그렇게 별종이 되는 사회의 시선.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내'가 아닌 '엄마'로만 살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내가 나를 포기하고 매달리던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 나를 떠나가려 할 때의 그 배신감을 어찌할 것인가. 그 화살을 자식에게, 남편에게, 심지어 부모에게, 사회에게 꽂는다. 잘못한 거 없는 거 같은 나에게 꽂기에는 내가 너무 아프고 억울하다.



우리가 목매야 할 것은 아이들의 성적이 아니라, 우리도 잘 모르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없을지 모를 '행복하게 사는 법'이다. '나는 이번 생은 글렀으니, 너만은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말하는 건 백세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인생과 아이들에게 모두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 힘들더라도 우리가 우리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함으로 아이들이 그렇게 되는 데까지의 도움만 주면 된다. 그 이후는 이제 바통을 같이 붙들고 애면글면 하지 말고, 아이의 삶의 바통은 아이에게 주자. 서툴 것이고, 뛰었다 걸었다 멈췄다 넘어졌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떤가. 다 큰 나도 넘어지고 깨지고 그러면서 다음엔 덜 깨져야지 조심하며 살아가는데, 아이가 이만큼 산 나보다 서툰 건 당연하고, 그렇게 지 삶을 배워나가는 거지. 나는 나의 바통을 들고 내 길을 가면 된다. 론, 쉽지 않은 일인지 알고 있다. 나 또한 나를 벗어나는 아이들을 견디는 일은 나를 깎을 만큼 힘들다. 그래서 매일 이렇게 외치고 있는 거다. 놓아주어야 한다고.



이미 유명 래퍼인 이영지가 <쇼미더머니>에 나왔단다. 그 어린 이영지가 하는 말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 중이란다, 내가 누군지 치열하게 고민 중이란다. 걸 위해 출전을 결심했단다.

이렇게 영리하고 기특할 수가. 마흔이 넘어 이제야 하는 나의 고민을 그 스무 살의 어린 아가씨가 한단다.


의 20대도 그랬어야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내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진 사람인지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만큼 내 자신에 대해 고민한 성숙한 성인들이 결혼이란 걸 했어야 했다.


뭐, 시간을 돌릴 재간은 없으니 이제부터 그리 살아가면 된다. 다행히도 우리는 백세시대를 살고 있으니, 지금도 충분히 늦지 않았다고 믿 싶다.



이 책에서 사람의 목숨을 숙명, 운명, 사명, 천명, 수명의 단계를 밟으며 성장하고 소멸해 간다고 말한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난 나의 숙명을 넘어, 큰 흐름을 타고 가는 운명 속에서도 내 삶의 방향키는 내 손에 꼭 쥐고 나아가며, 내가 이 세상에서 다해야 할 사명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또 깨닫게 될 하늘의 뜻, 천명을 바라보게 되다, 내게 주어진 수명을 다하고 소멸해가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나는 몸이 아프고 강제 휴식을 하며 나의 사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내가 독서로 나를 찾아가고 있듯이, 나와 인연이 되는 아이들에게도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인듯하다. 행복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징검다리로 책을 활용할 수 있는 과정을 함께 해주고 싶다. 회복과 치료로 잠시 쉬고 있는 나의 일을 다듬어 다시, 잘, 시작할 것이다. 나의 세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그 많은 아이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해보지혜운 세대이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브런치 작가라는 과분한 타이틀을 얻게 되었으니, 사명을 가지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일지라도 나의 성장기와 그 안에 깨달음들을 전하려 한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천명을 깨닫게 되는 날도 있지 않을까.




50대라면 이제 꾹꾹 눌러 참는데 되도록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았으면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즐거운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시간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결국 내가 나로 잘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와 내가 모두 살 길이다. 사십 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녀들이 아직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견뎌내야 하는 일이 많은 줄 안다. 나 또한 그렇다. 그래도 50쯤이 되었을 때는 세상일을 이해할 수 있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과 감성을 갖추고 있었으면 좋겠다. 갖고 싶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위해 오늘도 쓰고, 읽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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