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만난 <데미안>은 지금까지의 데미안과는 완전 다른 것이었다. 유년시절에도 한 번쯤, 삼십 대 어디쯤에도 한 번쯤 읽었고, 불과 2-3년 전에도 읽었으나 큰 감흥이 없었다는 것에 나는 이제야 놀란다.
헤세가 데미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는 것이 내가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된 사춘기를 겪어내고 있다는 뜻인 거 같아 부끄럽고 슬프고 또 기뻤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를 찾아가는 길>의 인식의 첫 단계는 기존의 것으로부터의 떠남이다. 만약 내 유년 시절에 누군가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너는 어떤 색깔인지 아느냐고 물어주었더라면 나는 어떤 고민을 했을까, 지금의 내 삶보다는 좀 더 일찍 내 색깔을 찾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기존의 것으로부터 떠나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나는 지금껏 회피하며 살아왔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해 왔다.
에밀 싱클레어는 자신이 속한 유년의 밝은 세계(가족, 도덕, 종교)에 있으면서 그 세계들에도 어두운 다른 면이 존재하기도 하며, 또 알지 못했던 어두운 세계에 발이 빠지며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압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이었다. 데미안이 악마를 숭배해서가 아니라 싱클레어, 나아가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악한 모습까지 그게 모두 다 나라는 사실을 바로 보라는 의미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전체, 세계의 전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인생의 해답이 필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데미안은 어쩌면 싱클레어 본인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는 아니었을까. 내 인생의 해답을 알고 있는 것은 나 말고는 없다. 기존의 틀 안에서만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그 우물 안의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 데미안은 악인으로 대표되는 카인을 옹호했다. 그 비판과 남다른 시각들은 싱클레어가 세상을 깨고 나오려는 첫 시도들의 출발점이 되어 주었다.
싱클레어는 많은 방황을 겪어낸다. 어제까지 조숙한 냉소주의자였다가 오늘은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지닌 사원의 하인이 되기도 했다.
피스토리우스 신부와의 대화를 통해 싱클레어는 나를 형성하는 일에 도움을 받는다. 그와의 모든 대화가 자신의 허물을 벗고, 알껍데기를 부수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 한 세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인간이 되는 거라고 말한다. 열여덟 살, 피스토리우스의 만남은 싱클레어의 인생에 자신으로 가는 길을 완성하게 해 주는 큰 한 걸음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싱클레어는 성장해 나간다. 전장에서 만난 데미안은 말한다.
살아가는 어떤 순간에 다시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는 네가 불러도 올 수 없다고. 내가 필요한 순간 네 자신 안으로 귀를 기울이면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거라고.
성장을 거듭하고 어른이 된 싱클레어에게 더 이상 데미안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도 물론 누군가에게 도움을 간절히 청하고 싶은 순간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해답은 결국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나만의 해답이 있을 뿐.
사춘기는 겪어야 한다. 자녀가 사춘기 없이 성장하는 거 같아 보이는 것이 결코 반길 일이 아니다. 싱클레어처럼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 안의 세계가 그저 거기에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어른이 되고, 큰 결정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유년 시절 그것을 고민하지 않고 어른이 된 수많은 어른들은 그것이 마흔이 되었든, 예순이 되었든, 반드시 겪어야 한다. 지금 내가 겪어내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