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소녀들을 품은 풍경

햇살, 징검다리, 바람, 돌담, 한복 그리고 모감주나무

by Bloom지연

/ 1

햇살


나는, 햇살이야.

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어린 소녀의 이마 위에도,

기운 빠진 마당에도,

고요한 빨래터에도

그저, 말없이 스며들 뿐이야.


그날도 나는 마사코의 얼굴을 비췄어.

햇살 좋은 날,

놀이는커녕 심심하단 말만 반복하는 아이.

혼자 요깡을 베어 물며

마당에 반쯤 드러누운 그 아이는

말하자면,

아무 맛도 없는 감자 한 알처럼,

말없이 있었지.


반면에

옥이의 얼굴은 달랐어.

등짐처럼 책임을 이고,

빨랫감을 바구니에 담아

터벅터벅 개울가로 향하던 그 걸음.

나는 똑같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지만

옥이의 얼굴에는,

바람보다 먼저 스친 물빛이 있었어.


햇살 아래

같은 풍경은 없단 걸

그 아이들이 내게 가르쳐줬지.


/ 2

징검다리


나는, 징검다리야.

동네 어귀 맑은 개울 위에 놓인

묵직한 돌덩이들 중 하나지.

늘 그 자리에 있어.

누구의 발걸음이든 다 받아주지.

그러다 어느 날,

내 위로 낯선 발이 툭, 닿았어.


그 발은,

조선 아이들이 디딜 때처럼

살금살금 사뿐사뿐 걷지 않았어.

밝고, 경쾌하고,

거침이 없었지.

그래서였을까.

나는 조금 당황했어.

‘뭔가, 낯설다.‘


미끄러졌어.

그 발은 미끄러졌고

나는, 그제야 알았어.

그 순간, 조금 미안했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진짜야. 절대.


다행히

바로 옆에서 옥이가 손을 내밀었지.

나는 그 장면을 정확히 기억해.


그때부터야.

이 두 아이가 나를 건널 때

나는 이상하게,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오래

그 무게가 내게 머물기를 바랐지.


나는 말이야,

그 아이들이 처음 연결된 순간의

단단한 시선이었어.


/ 3

바람


나는 바람이야.

흘러가야만 해.

늘 가볍고, 조용하게 스쳐 지나가지.

하지만 가끔은,

내 흐름도 멈추게 만드는 기억이 있어.


그날도 그랬어.

두 아이가 마주 앉아 있었지.

하나는 단정한 댕기머리였고

하나는 가지런한 단발머리였어.


나는

그 아이들의 머릿결을 가볍게 쓸었어.

바람결에 실린

작은 솜털 하나,

고운 볼살,

촉촉한 입술의 결까지

나는 다 느꼈어.

두 소녀의 속살처럼 맑은 웃음이

살랑, 하고 내게 닿았거든.


그 웃음은

조선의 오래된 담장에도,

햇살 머문 장독대에도

잠시 머물다,

내게 번져왔어.


나는,

그 순간의 숨결을 아직도 기억해.

소리 없이 다가갔기에

모두를 품을 수 있었던—

그날의 바람이야.


/ 4

돌담


나는, 돌이야.

그중에서도 아주 오래된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돌담길이지.

이 마을 가장자리,

제일 끝집 앞에서

나는 평생을 서 있었어.


사람들은 늘 지나가.

말없이도 걷고,

슬프게도 걷고,

가끔은 노래하듯이 걷지.


순이가 서울로 떠난 그날부터

이 길은 조용했어.

옥이의 발걸음만이

사락사락,

조심조심,

나를 따라 들어왔지.


그러다 어느 날,

저 멀리서부터 까르르 웃음소리가

탁, 탁,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내게로 다가왔어.


나는,

솔직히 말해,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나의 깊은 곳까지 진동이 퍼졌지.

부스러질 듯 졸리던 낮잠을

깨워줄 만큼 말이야.


옥이와

그 낯선 단발머리 아이.

둘은 마치

내 몸 위에서 뛰놀기라도 하듯

뒹굴고 웃고,

담장 너머로 비밀 이야기를 속삭였어.


나는 들었지.

“네가 더 예뻐!”

“아니야, 네가 더 귀여워!”

그런 식의,

아주 작은 사랑의 말들을.


나는 오늘도

그 아이들의 발자국을 기억해.

그 아이들의 숨결,

햇살과 바람,

모감주 꽃잎까지 어우러졌던

그 계절을—

담장 너머로 슬쩍 기울이던

내 마음까지도.


그래,

나는 돌이지만,


아이들을 품었던 기억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말랑했어.


/ 5

한복


나는, 한복이야.

고요히 바람을 품고,

시간을 천천히 걷는 옷.

늘 조용한 다락 한구석에서, 접힌 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려.


내 치마는 넉넉했어.

고름은 가지런히 흘렀고,

소매 끝엔

기움의 자국이

작은 주름처럼 내려앉아 있었지.


나는 옥이를 오래 감쌌어.

그 아이의 좁은 어깨 위로

햇살이 비칠 때면

나는 조심스레 주름을 고르고,

고요한 마음으로 포근하게 덮어줬지.


그런 나를,

어느 날 낯선 아이가 입었어.

단발머리에 웃음기 가득한 아이.


그 아이는 나를 입고

손을 허리에 척 얹은 채

환하게 말했지.


“이 한복,

앉아있기도 편하고,

고무줄 놀이하기도 너무 편해!”


나는 깜짝 놀랐어.

조선의 아이들은 속치마를 입고,

저고리를 여미는 그 순간부터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거든.


하지만 그 아이는 달랐어.

나를 입고

마당에 털썩 주저앉기도 하고,

웃으며 고무줄을 넘기도 했지.

내 치맛자락은 휘날렸고,

소맷부리는 팔을 따라 경쾌하게 흔들렸어.


그 순간 나는 알았어.

내가 품이면서도

놀이터가 될 수 있다는 걸.

단정함은 언제나 단단함과만

닿아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아이는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줬어.

“자유롭고 편안한 아름다움.”


나는 이제 더 이상

움직임을 가두는 옷이 아니야.

작은 소녀들의 발걸음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마음이 되었지.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 아이를 떠올려.

나를 입고 마당을 뛰어다니던 그 웃음,

아직도 내 고름 사이 어딘가에

가만히 묻혀 있단다.




지금도 나는 그 아이들과 함께 있어.

그 작은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이 낯선 곳 어딘가에 와 있어.


아이들은 이제,

이 고운 옷이 더는

고운 순간에만 입히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까.


나는 마지막까지 아이들의 곁에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있어.

불안과 고통 속에서

몸을 웅크린 그 아이들을

내 품으로 꼭 안아주려 해.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마음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단정한 선으로,

고요한 주름으로,

아이들을 가만히 감싸주고 싶어.


지금은

단지 이 말밖에 할 수 없어.


“나는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있어요.

이 낯선 곳에서,

엄마처럼 소녀들을 안고 있어요.”


/ 6

모감주나무


나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 어귀에 서 있었단다.

들어오는 이를 맞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며

한 자리에 뿌리내린 채,

나는 수많은 계절을 견뎌왔지.


내 그늘 아래선

조심스레 첫사랑을 속삭이는 아이도 있었고,

속상한 하루를 토닥이는 이도 있었지.

나는 알고 있어.

사람의 눈동자에는

그날의 하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두 소녀가 내 아래를 지나쳤단다.

바람을 타고 길게 흩날리는 댕기 하나,

그 옆엔 햇살처럼 단정한 단발이 있었지.

작은 발걸음, 낮은 웃음,

그 모든 것이 내 가지 사이로 스며들어

봄빛처럼 은근히 흔들렸단다.


나는 그 아이들을 기억해.

마지막으로 이 길을 걷던 날,

나는 계절보다 조금 일찍

내 꽃을 화사하게 피워냈어.


그건 아마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인사였을 거야.


슬픈 눈동자들을 본 적도 있고,

다정한 손 인사를 배웅한 적도 많았지만,

그날의 꽃은

그 어떤 계절보다 환하고도 아팠단다.


내 꽃은 바람에 흩날리며 속삭였지.


“잊지 않을게.”


지금도 나는 여기에 있어.

여전히 피고,

여전히 지고,

또다시 피어난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 아이들의 발자국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꽃을 피우고 있단다.




소녀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또 있었군요.

그래요. 또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말하지 않고

어쩌면 흘려보낼 수 있었던 존재들.

있었다고 믿지 않았던

모든 것들조차도—


그 소녀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Bloom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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