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침대 신세는 면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주룩주룩 내리는 겨울비로 여전히 집 붙박이 노릇 밖에는 할 수 없다 보니, 우울함의 끝을 향해 치닫는 파리의 겨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득 겨울은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보니,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이 바로 섰고, 그래서 무작정 몽블랑행 편도 기차표만 끊어서는, 나 홀로 스키여행을 떠났다. 일주일이 될지 이주일이 될지 모를 여정으로 그렇게 파리를 탈출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14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내 발 모양에 맞게 정교하게 다져진 스키부츠를 어깨에 걸치고, 부피가 큰 스키복은 다 껴 입은 채 운동복과 속옷 몇 벌만 챙겨 담은 작은 백팩 하나만 들쳐 매고 그렇게 가볍게 집을 나섰다.
UCPA라는 프랑스의 비영리 스포츠 재단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건물을 싼값에 사들여 변동비용을 줄이고 손익분기점을 최소로 하여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최저의 비용으로 다양한 스포츠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스포츠 여행사인데, 친구 죤의 추천으로 알게 되었다. UCPA 웹사이트를 통해 알프스 샤모니 스키장에서 일주일간 Hors piste라는 ‘슬로프 밖에서 타는 스키’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자연설의 절대량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스키장은 슬로프를 제외하고는 눈이 없어 스키를 탈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거의 없지만), 알프스는 방대한 자연설량으로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하얀 눈뿐이므로 정해진 슬로프가 아닌 그 바깥세상을 스키로 탐험하기로 한 것이다. 촘촘한 나무 틈 사이사이로 숲을 가로지르고, 수백 년이 넘은 빙하 바로 옆을 타고 내질렀던 그 한 주는 내 생애 최고의 스키여행이었다.
나와 한 주를 동고동락한 우리 팀을 먼저 소개하겠다. 알프스 토종 산사나이로 모굴스키 선수까지 지냈던 샤모니 토박이, 마누 팀장을 선두로 영국, 호주, 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의 7명의 팀원들이 꼬박 한 주를 동고동락했다. 매일매일 동이 떠서 저물 때까지 스위스, 이태리, 프랑스에 걸쳐있는 알프스의 야산을 함께 누비고 다녔다. 슬로프 밖에서 타는 스키는 눈사태의 위험이 있어서, 행여나 그런 불상사가 생겼을 때 눈사태에 갇힌 팀원을 찾아내는 일 역시 팀원의 역할이기에 매일 트랜지스터를 이용해 숨겨둔 가방을 찾는 구조 연습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비록 일주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는 똘똘 뭉치는 팀워크를 자랑했다.
첫날은 가장 가까운 브레벙(Brevent) 쪽으로 움직여 슬로프에서 몇 차례 몸을 풀고 난 후, 슬로프 바깥 야산으로 접어들었는데, 저 아래로 빽빽이 들어찬 소나무 숲이 내려다 보였다. 저 나무들 사이사이를 지나야 한다고? 처음에는 농담이겠지 생각했다. 외다리 스키를 타지 않는 이상 어찌 저 좁은 틈을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그렇게 후들후들 대는 다리를 주체 못 하고 있는 내 앞으로 우리 팀원들이 한 명씩 줄 지어 숲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물러설 곳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슬로프 바깥에서 야생 스키를 타고 있었기에 우리 팀을 제외하고는 어느 생명체 하나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안전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어쩐다. 선택의 여지없이 남들 하는 대로 나도 가보는 수밖에. 그렇게 경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내 길목을 막아 보겠다고 눈앞으로 닥치는 나무 나무 사이를 지날 때마다 친구 죤한테 빌려 쓰고 온 스키 헬맷을 무슨 철 방패라도 되듯이 들이밀었다. 그렇게 몇 차례에 걸쳐 촘촘한 나무 숲 사잇길을 누비다 보니 내 나름의 숲 길을 읽는 감각이 생기고 더 이상 겁나지 않았다. 되려 어떤 모험이 내 앞에 놓여 있을까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새로운 야산을 누볐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숲에 익숙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면 산사람의 감각을 길렀던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쌓여 가는 동시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역시 뭐든지 마음먹기에 달린 것.
한참 하얀 언덕을 넘고 넘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하려고 꺼낸 핸드폰은 이탈리아나 스위스의 로밍폰으로 바뀌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그저 새하얀 이 야산에서 나라 간 국경이, 더 정확히는 국가 통신망이 명확하게 구분 지어져 있다는 것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 이렇게 세 나라의 국경을 넘나드는 샤모니 야산에서의 스키여행 넷 째날에 접어든 목요일 오후에는 샤모니 리조트에서 가장 높은 3300m의 그렁몽테 (Grands Montets)에 올라갔다. 거기에서 상당히 가파르고 얼음판에 가까웠던 능선을 넘어서자 눈앞으로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600만 년의 아트졍티에 빙하 협곡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하얀 눈 세상에 자리 잡은 옥 빛의 그 거대한 빙하는 시작이 어디인지 끝이 어디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길고 넓은 자태를 드러냈는데, 그 아름다움은 도무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쿵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하면서 목이 메어 탄성 조차 지를 수 없었던 나의 신체 반응을 설명하면 조금은 그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 어마어마한 옥 빙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우리는 그 빙하 협곡을 내 바로 오른팔에 끼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산을 스키로 누비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 뒤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리 팀은 차례로 각자만의 빙하 협곡을 타고 내려가는 그 순간을 맘껏 누렸다. 그날의 느낌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해서 떠올릴 때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한 듯 콩닥콩닥 심장이 뛴다.
그 일주일의 스키 여행은 난생처음으로 슬로프 바깥세상을 경험한 것 이 외에도 프랑스 생활 1년 반 동안 엠비에이 생활에 몰두해있던 나에게 그 바깥의 프랑스 세상을 향해 내디딘 첫 발이 아니었나 싶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의 서툴지만 노력하는 불어와 에슈쎄파히 학교 명성 덕분이었는지 캠프 첫날부터 우연찮게 프랑스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게 됐다. 일주일간 나와 같은 방을 공유했던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변호사, 간호사, 회사원의 직업을 가진 평범한 프랑스 친구들로 스키가 끝나고 저녁 식사 시간 즈음에야 한 방에 모이면 피곤한 몸을 함께 누이고 더불어 와인잔을 비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나의 짧은 불어와 유창한 바디랭귀지로.
나 스스로는 벌써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을 프랑스에서 프랑스 와인을 마시고 바게트를 뜯으며 살았는데 이런 부끄러운 수준의 불어 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 그리고 고개를 내미는 질문 하나는, 내가 과연 진짜 프랑스를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그동안 꽉 찬 스케줄로 학교와 집을 오가기도 바빴고,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도 주로 엠비에이 친구들과 어울렸고, 여행을 다녀도 세상 각지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였다. 에쓔쎄파히 엠비에이(HEC Paris MBA)에서의 1년 6개월의 시간 동안 세계적인 안목과 네트워크를 키울 수 있었지만, 그 바깥의 진짜 프랑스에 대해서는 여전히 낯선 미지의 세상으로 그저 이방인이었다. 슬로프 바깥세상을 스키를 타고 누빈 것처럼, 이제 엠비에이 바깥세상, 진짜 프랑스에서 함 살아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