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 호얄.
식사 전에 내가 즐겨 먹던 음료다. 샴페인을 베이스로 해서 다양한 과일시럽을 첨가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페쉬 (복숭아) 맛이다. 우리나라는 술자리에 앞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서야 속된 말로 술을 푸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곳은 저녁을 앞두고 간단한 스낵과 식전 주로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나서야 본 식사로 접어든다. 그 아페리티프 (Aperitif)의 종류는 정말 다양한데, 나는 키르 호얄이 가장 좋다.
식사는 굉장히 중요한 사회 활동의 하나이다. 2004년 사회 초년생으로 제약 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시절, 선배들로부터 밥을 혼자 먹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성공 비결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먹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식사 중 오고 가는 대화가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프랑스의 아페로(Apero) 문화를 매우 즐겼던 것 같다. 서로 인간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고 식사에 앞서 한두 잔의 가벼운 음료는 사람을 릴랙스 하게 해 주어 대화를 훨씬 부드럽게 해 준다.
여러 해동안 벼르고 별렸던 서핑을 배우기 위해 올여름에 아키텐 (Aquitaine)으로 떠난 여행에서도 첫날 저녁은 역시나 아페로 타임이다. 아직 낯설고 서먹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술 한잔을 앞에 두고 서로 통성명을 하는 자리인 것이다. 멩숭멩숭 어정쩡하게 서있던 사람들도 한 두 모금 축이고 나면 좌우로 앞뒤로 서있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게 되고 그렇게 안면을 트게 된다. 아키텐에서의 일주일 내내 날씨가 포근해서였는지, 공식적인 첫날 아페로 타임 이후에도 캠프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저녁 6시 반부터 숙소 바깥에 자리를 틀고 앉아 아페 로타임을 가졌다. 나와 같은 초보생, 또는 중급, 고급 생까지 서핑을 잘 타는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가졌기 때문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서핑에 대한 정보 교류가 주를 이루었고, 왕초보인 나에게 고급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흥분되고 즐거웠다. 실제로 나처럼 혼자 캠프에 참여한 사람이 절반 이상이었는데 이렇게 아페로 타임으로 한두 잔 걸치고 나면 다들 피로가 풀리고 나른해져서 저녁시간은 훨씬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간다.
이러한 아페로 타임은 단순히 친목 도모를 위한 사적인 용도만이 아니고, 실제 스폰서를 구하는 비즈니스적인 경우에도 종종 사용된다. 엠비에이 과정 중에는 다양한 케이스 컴피티션이 실시되는데, 그중에 제네랄 매니지먼트 컴피티션이라는 대회에 참여하게 됐다. 참여비가 700유로인데, 우선 학교 자체적으로 사전 접수한 팀 중 두 팀을 선정했고, 소하, 제임스, 고탐,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스폰서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이 행사 주최 측인 딜로이트과 몇몇 후원 회사들이 스폰서를 하는 모임을 주최한다고 해서 우리는 간단한 팀 프로필을 준비해서 행사에 참여했다. 20개가 넘는 회사가 모이는 행사였고, 프랑스의 많은 경영학도 생들과 엠비에이 학생들이 스폰서를 찾기 위해 모여들어 행사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는데, 재미있었던 것은 그 진행 방식이었다. 우리는 컨벤션처럼 각 회사 별로 부스 혹은 데스크가 설치돼있고 담당자가 신청자를 면담하는 형식을 기대했었는데, 우리 앞에 펼쳐진 공간은 어릴 적 베르사유의 장미 만화책에서나 봤던 우아하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넓은 연회홀이었다. 그곳에는 한 손에는 와인이나 음료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도 북적이고 있었다. 입장 시 제공된 이름 표을 부착하고 있지만 가까이에서 읽지 않으면 누가 어느 회사에서 왔는지 알아채기도 쉽기 않다. 이렇게 격식 없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각 회사의 담당자들을 만나고 우리 팀을 소개하고 공적인 그러나 동시에 사적인 형태의 자기 피알을 해야 하는 자리.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저 한 구석에서 술잔만 거푸 들이켰던 것 같은데, 어느새 한 두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말을 트다 보니, 몇몇 회사 담당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우리는 운 좋게도 포르투갈 항공사로부터 참가비를 스폰서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아페로 타임은 프랑스 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네트워킹 형태이다. 나도 몇몇 네트워킹 아페로에 참석하면서, 점차 이러한 아페로 타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격식을 아주 차리지 않지만 너무 사적인 자리도 아닌 그 중간쯤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해나가다 보면 같은 분야에 관심 있는 동료이자 동시에 선의의 경쟁자이기도 한 친구들도 만나게 되고, 그 관계는 그냥 일 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련 분야의 네트워킹 행사에 가면 다시 마주치게 되고 그렇게 내 관심 분야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둔 지인들을 만들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