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일 년이 흘렀다.
암스테르담과 바르셀로나에서의 출장을 마치고 겨우 삼일의 시간을 내어 오를리 공항에 발을 디뎠다. 택시를 잡아타고 알렉스 집으로 (물론 주소로 얘기했다) 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내뱉는 내 불어를 과연 알아들어줄까 간절히 바라면서. 그리고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불어 학원 두 달을 간신히 마치고 첫 발을 내디뎠던 삼 년 전 그날도 샤를 드골 공항에서 쥬이엉조사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나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택시 기사에게 또박또박 학교 주소를 읊었다. 그리고 학교로 향하는 길, 창문 너머로 어느 화가의 붓끝에서 탄생한 듯한 구름들이 뭉개 뭉개 하늘에 그려진 것을 한 없이 바라보며 어쩜 같은 지구에 하늘과 구름이 이렇게 다른지 궁금해했다.
파리는 여전했다. 당일 오전에 일정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시간 맞춰 간 바스티유 오페라 하우스의 티켓 창구에서는 오늘 갑작스러운 스트라이크로 오페라 공연이 그냥 콘서트로 대체됐다고 하고, 버스를 타고 16-17구를 가로질러 오페라 하우스로 가는 길에는 뭔가 통제가 생겨서 모든 여객을 내리게 했고, 역시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그렇게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이며 각자의 갈 길을 찾아 흩어졌다. 골목 모퉁이마다 위치한 거리 카페에는 여전히 빨간 립스틱을 곱게 바른 할머니들이 에스프레소 한 잔에 퍼즐 맞추기를 하거나 조용히 포켓북을 읽고 있다. 좁고 울퉁불퉁한 그 길을 걸으면서 마주치는 작은 카페와 표지판은 내가 파리에서 함께 했던 그 사람들과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지만 같은 감성과 고뇌로 이 거리를 누볐던 수많은 일화로 시간을 초월한 친구들이었다.
지금 나는 엠비에이 졸업과 프랑스 생활을 정리한 후, 다시 회사원의 신분으로 돌아와서 싱가포르에서 일 년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종종 그릇의 크기에 대해 얘기하고는 한다. 서른 하나, 둘을 지나 서른셋까지 내 그릇은 얼마나 커졌을까. 지금 당장 좀 더 나은 월급을 받고 있고, 좀 더 그럴듯한 직함이 명함에 새겨져 있으니 이걸로 내 그릇은 커진 걸까… 나는 예전보다 내 현재의 일과 인생에 대해 얼마나 더 혹은 덜 만족하고 있을까. 나는 여전히 수많은 고민과 물음표가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글쎄, 그 그릇의 크기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측정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파리와 싱가포르로 이어진 지난 3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 나름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그냥 획일적으로 수치화된 그 크기를 키우기 위한 노력이 아니다. 그 내 그릇이란 애가 어떤 모양이고 어떤 재질로 되어 있고 그래서 뜨거운 것에 약하니 세심해 다뤄야 하는지, 무식하게 투박하여 좀 더 무겁고 거친 재질을 담아도 견뎌내는지 등등. 즉, 지난 삼 년 간 다양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내 그릇의 크기보다는 그 모양새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른들 말씀처럼 사람은 각자 본인의 그릇을 갖고 태어난다고 했고, 그 그릇에 맞는 것을 담아내는 것이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전 세계 어디에 가도 반갑게 동네 한 바퀴 구경을 시켜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고,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 난감한 낯선 정보에 대해 선뜻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고마운 지인들이 있고, 하루 일과가 끝나고 사람들과 나누는 와인 한 잔이 주는 그 소중함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나의 남은 인생이 좀 더 풍성할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
헤밍웨이가 말한 것처럼 파리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돈이 많든 적든 각자 꿈을 키울 수 있고, 이런 어이없는 파업도 오래되고 불편한 시설물도 모두가 매일 견뎌내야 한다. 이렇게 파리는 내 마음의 축제로 남았다. 그리고,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인생은 내 마음에 파리가 머무는 한 어디를 가더라도 무엇을 하더라고 언제나 축제로 가득하게 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그런 시간 구분이 없이 무한한 역사의 한 부분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 멋이 진다. 파리, 그렇게 내 마음에 축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