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검술사

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by 예그림

오늘의 내용은 '여러 가면 사이에서 갈등하는 당신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고 어른이 되며 가면을 쓰고 살아온 것 같아 진정한 자신이 아닌 가식 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고민에 대한 이야기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 고민을 한 번 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고민일 것이다. 이에 대해 생각지 못한 방향의 답을 제시하는 것이 오늘 내용의 매력이다.


나는 마음에 전혀 없는 빈말을 잘 못한다. 거짓말을 못하는 착한 사람이거나 그런 게 아니라, 마음에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티가 많이 나고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다. 나름 사회생활에 닳고 닳은 어른이 되어가며 빈말을 하지 않고 상황을 부드럽게 넘길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정말 좌충우돌이었다.

서비스업이나 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종에서 일정 수준의 '빈말'은 반드시 필요한 생활의 스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서 힘들었다. 꽤나 기준이 높고 정직한 것은 장점이었지만, 그게 아이들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초임 교사일 때 학생들에게 잘한 것이 아닌데 잘했다고 해도 되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때 칭찬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옳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공감을 바라는 아이들에게 현실 위주의 조언을 건네며 거리가 멀어진 것도 여러 번이다.

지금은 '빈말'과 '거짓말'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빈말은 필요에 따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빈말'이 관계와 맥락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지도 이해한다. 물론 내 기준에서는 빈말도 '텅 빈 말'대신 '약간 채워진 여백이 있는 빈 말' 정도만 한다는 것이 나의 타협점이다.

예를 들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직언도 하지 않고, '완전 안 어울린다'는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내 눈에 그에게 어울리지 않을 뿐 그 옷 자체의 매력이 있을 수 있고, 그 매력을 알아보고 구매했을 것이니까 '색이 예쁘다, 무늬가 예쁘다'라고 말한다. 만약 옷 자체가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개성 있다'라고 하거나, 좀 더 친밀한 관계라면 어떤 점에서 그 옷에 매력을 느꼈는지 물어보고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알아갈 것 같다.

어떤 것이든, 거짓말도 하지 않지만 직언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타협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책에서는 그런 나를 지지해 준다.


가면을 쓴 것이라 힐난했던 태도는 오히려 서로의 행복을 위하는 성숙과 배려였다. 이는 기망이나 사기와는 다르다. 거짓된 포장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의도를 감추는 것과, 본능만 따르기를 거부하고 상황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오해한다. 그 오해는 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진실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 인식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다음에 할 말과 행동을 고민하는 것을 가식이나 위선이라고 폄하한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 159.



위선이나 가식이라고 폄하할 필요 없이. 성숙하고 배려심 있는 '나'의 또 다른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말과 행동을 다듬어서 말하는 것. 성숙한 어른의 표본이 아닐까?

위선, 가식, 배려 이런 것을 떠나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지 않은 것이라는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본능만 따르지 않고 상황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재정의하면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어제도 썼지만 이번 장(축)은 '맥락으로서의 자기'였다. 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맞게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그래서 어떤 '나'이든 '그런 맥락'에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함께 손잡고 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렇게 치면 성숙하고 배려심 있는 어른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는 좋은 나 아닐까? 솔직하게 떠오르는 말을 모두 하며 관계를 깨뜨리는 나가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아닐 것 같다.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생각과 느낌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가면이 아니다. 오늘의 나는 어떤 내가 되어볼까, 어떤 내가 최선의 나인가, 이를 고민하는 순간 그 자체가 '가식 없이 진짜 나'다. 저절로 찾아오는 느낌과 생각만이 진정한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삶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진정성 있게 충만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각자가 지닌 고유한 힘을 너무 간과하는 것이다.

(중략)

"만약 XX 씨가 앞으로, 본능은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부터 100년을 꼬박 그 가면이라는 것을 쓰고 살다 죽는다면 어떤 것이 페르소나이고 어떤 것이 진짜 나일까요?"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 161-162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나, 더 좋은 나'가 되고 싶다. '진정한 나'를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진정한 나 중에는 '더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나'도 분명히 있다. 계속 그 가면을 쓰고 살면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명확하지 않듯이.


제목에 쓴 변검술은 아래 사진과 같이 얼굴의 마스크가 계속 바뀌는 중국 천극의 일종이다.

(출처) 중국 국제 방송의 변검술 영상 기사 중 일부

https://korean.cri.cn/2023/06/21/ARTIONYDOddRfS6ckZvZG0PW230621.shtml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표현하고 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라고도 한다. '가면'도 '페르소나'도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숨긴다, 숨겨졌다는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는 단어이기 때문에, 진실되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변검술'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변검술은 마스크가 한두 번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연극자의 동작에 따라 수십 번도 더 다른 마스크로 바뀐다. 우리는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혹은 끝나도) 공연자의 진짜 민낯을 만나보기 어렵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민낯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지만,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나의 완전한 민낯을 꼭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여러 개의 가면을 상황에 맞게 자유자재로 바꾸어 가며 공연하는 변검술사처럼. 오히려 가면이 많고 자유자재로 바꿀수록 프로페셔널한 변검술사이듯이, 우리 삶에서도 많은 가면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더 프로페셔널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가면이라는 개념이나 페르소나라는 개념도 좋지만, 나는 '변검술사'로 살고 싶다. 가면 안에서 고생하는 내 진짜 민낯을 나 스스로 예뻐해 주고, 사회에서는 맥락에 맞는 다양한 가면을 바꾸어 쓰고 싶다. '변검술사'로 '맥락으로서의 자기'를 인식한다면,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는 죄책감도 좀 덜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지혜로운 할머니'의 가면을 내 것처럼 계속 쓰고 다니고 싶다. 오래 쓰고 다닌 가면이 진짜 자기 얼굴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그 언젠가 진짜 할머니가 되었을 때는 '지혜로운 할머니'가 내 민낯이 되어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우리 모두 변검술사가 되자. 변검술은 거짓말도 위선도 아니다. 프로페셔널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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