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바꿀 수 없다. 단지,

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by 예그림

오늘 챕터의 제목은 '그것은 나의 위기가 아니라 타인의 불안일 뿐'이다. 오늘 챕터의 주된 이야기는 숨 쉬듯이 문제를 지적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사람의 이야기였다. 끊임없이 그를 비난하거나 걱정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성적, 부, 배우자 등으로 서로를 비교하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고통받아온 그의 이야기는 꼭 남의 이야기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 이야기의 대상은 가족이었지만 회사 상사나 동료로 인해 불편할 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핵심은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관계에서의 불편함과 고통이 반복되는 것'이다.



요즘 커뮤니티나 기사 글 등을 통해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상한 남편, 동료, 직장상사, 시댁, 처가, 지인이나 친구 등등. 나도 처음에는 그런 글들을 보며 그들에게 공감하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어'라며 함께 화내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부분의 결론이 흔히 말하는 '고구마'나 '사이다' 중의 하나로 끝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괴롭히는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고 댓글로 사람들이 같이 욕을 해주는 경우. 같이 욕하고 공감을 받은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을 수는 있지만, 온라인에서의 공감이 고구마같이 답답한 상황을 바꾸어 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사이다 같은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였을까?

더 나아가는 경우에는 진짜로 댓글의 조언을 받아 그들과의 관계를 갈라섰다는 사이다 같은 후기를 남겨주기도 한다. 그 후기에도 사람들이 잘했다고 응원을 해주고 힘을 준다. 그런데 그 이후는? 동화책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이 나올지 잘 모르겠다.

무조건 참아야 하고 사이다 같은 결론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답이 하나로만 고정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참으면 호구가 되니까 관계를 끊어라. 회사가 힘들면 영혼을 빼놓고 돈 주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다녀라. 그냥 두지 말고 ~~ 처럼 복수하고 끝내라. 등등. 사이다 조언을 빙자한 대응책들이 나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구마도 사이다도 아닌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오늘 챕터의 사연자는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있다. 남과 비교하고 속물적이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가족을 사랑하고, 분명히 함께 좋았던 추억도 충분히 사랑받고 관심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사이다같이 끊어내는 것이 그에게 행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챕터의 매력도 그 지점이다. 그는 '사이다처럼'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결말을 선택하지 않았다. 미친 회사에서 그만두고, 나쁜 배우자와 이혼하며, 이상한 지인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 정말 좋았다. '왜 나는 끊어내지 못할까'라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그를 대하는 방식과 가치관을 바꿀 능력을 우리에게 없었다. 다만 적어도 남편과 아이와 함께 캠핑을 하는 천금 같은 주말 시간만큼은 전날 어머니와 통화한 내용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을 멈추는 연습부터 해보기로 했다. (중략)

어머니와의 통화 이후 찾아드는 불안과 괴로움을 애써 괜찮다며 다독이는 대신, 그저 그 불쾌함과 불안을 그대로 두고 그날 저녁 아이를 픽업하며 나누는 대화에 몰입하거나, 주말에 모처럼 교외로 나가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절규 대신, '괴롭혀지지 않을 자유'를 돌아보기로 했다.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146.



사실 이 챕터 전체에서 가장 꽂힌 것은 '나에게 그들을 바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배우자도, 직장 사람들도, 친구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어쩌면 그들을 끊어내는 대신 그들이 '바뀌기'를 기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일을 바라므로.


나는 확신한다. '우리는 그들을 바꿀 수 없다. 단지, 나 자신만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의 시야를 돌리는 것. 좁은 곳만 바라보던 것에서 바꾸어 다른 쪽을 바라보는 것. 그들이 바뀌어서 나를 다르게 대해주고 나를 구원해 주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가능한 것은 '나 자신을 바꾸는 것' 뿐이다. '괴롭히지 말라고 절규'하며 그들이 바뀌길 기다리는 대신에, '괴롭혀지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 찾는 것이다.




(위 사연의 뒷부분에 대한 요약)

어느 날 그녀는 통화할 때마다 불안과 압박, 반감을 쏟아내는 어머니를 '연민'하기 시작한다. 그 긴 세월을 엄마가 불안 속에서 지내왔다는 것을 통찰한 것이다.

명절날 가족들이 자녀의 학벌과, 이사 간 아파트의 시세로 기싸움을 할 때, 그는 '비켜섰다'.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난 가족들의 대화를 묵묵히 들을 뿐 구구절절 자신의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에 몰두할 뿐이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146~147.



책에서는 '비켜섰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전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싸움이 벌어지는 링에서 내려오기'라고 표현한다. 무엇이 되었든 나를 괴롭게 하는 상황을 내가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그냥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비켜서고 내려오는 것. 관망하는 것.

완전히 등지고 끊는 것이 답이 아니라 '비켜선다'는 표현이 참 현실적이다.


물론, 심각한 폭력이나 학대 등 생명에 위협을 주고 나의 존재와 정체성을 흔드는 것으로부터는 완전히 벗어나고 끊어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대부분은 그런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비켜서기'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특히 나를 괴롭게 하는 대상이지만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면. 위 사연처럼 그들을 원망하고 그들로 인해 고통받기보다는 그들을 '연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은 사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 자신의 불안이 너무 커서' 그 불안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것일 뿐이다.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변까지 상처 입히는 그들에 대한 연민. 나 역시 그들 중에 하나일 수 있고, 함께 서로 상처 주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일임을 알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나부터 바꾸는 것'이 남을 바꾸는 길이 되기도 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쌍방'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 대상 중 하나인 '나'가 바뀐다면 상대도 어느 정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꼭 상대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도, 내가 바뀌었을 때 상대의 같은 행동을 다르게 '해석'한다면 우리의 관계도 다르게 해석될 테니까. 무엇이 되었든 '내가 먼저 바뀌는 것'이 언제나 정답이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실천하기 쉽지 않은 정답이지만)




오늘이 3장 '현재와의 접촉'의 마지막 챕터이다. 고통을 수용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현재와의 접촉'의 핵심인 것 같다. 작가님의 마지막 응원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결코 당신보다 당신의 삶을 잘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의 삶을 폄훼하고 있다면 단언하건대 그것은 그의 불안이 드러난 것이다. 당신의 삶을 증명하거나 항변하지 말기를. 대신 당신의 삶과 당신만이 알 수 있는 행복의 원리를 추구해 보기를, 그저 지금 여기 당신의 삶으로 돌아오기를 권한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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