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오늘 챕터의 제목은 '믿을 수 없으니 믿음이라는 단어를 쓴다'라는 제목으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글이었다. 매우 공감하고 위로도 받았지만, 세 번이나 읽었음에도 내 것으로 꼭꼭 씹어 소화가 된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딱 제목대로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
오늘 챕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때로 나 자신과 스스로의 삶을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 일인지 생각한다."
우리의 평생 과제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해 주는 일.
예전보다는 정말 나 자신을 많이 인정해 주고 함께 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믿음'이나 '좋아함'까지 가기에는 왠지 먼 영역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먼저 책에서는 자기 자신을 믿는 방법으로 '따뜻한 제안으로서의 믿음'을 이야기한다.
불확실한 미래가 괜찮을지 확신하기 위해서는 '최악의 가정에 대한 답 찾기'라는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과거의 아픔을 바탕으로 어째서 어떻게 나빠질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스스로를 절망에 밀어 넣을 수 있다.
(중략)
그래서 조금 다른 형태의 믿음을 제안한다. 다음과 같은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 실패하고 좌절해 온 경험을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너무 당연해. 그만큼 힘들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다만, 나는 지금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고 있고 , 이왕이면 의미와 행복을 따라가는 삶을 살고 싶어. 그러니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자꾸만 실패의 아픔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내가 잘못되어 왔고 그래서 앞으로 잘못될 수밖에 없을지를 생각하는 대신, 지금부터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아갈 수 있다고, 꾸준히 살아낼 수 있다고 믿어주면 어떨까?'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 167~168
이번 축(장)이 '맥락으로서의 자기'였지만, 어쩌면 내게 이것은 언어로서의 재구성인 앞 장의 '탈융합'과 가깝게 느껴진다. 나는 항상 '최악의 가정'을 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과거보다 더 나빠지기는 쉽지 않을 테니, 과거의 경험이 나를 조금은 강하게 해 주었으니 최악으로 가지는 않을 거야.'라는 답을 내기 때문이다.
책에서 제안하는 방법은 '최악의 가정'을 생각하기보다 미래와 방향을 바라보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새로운 것을 마주하면 일단 최악을 가정하는 그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최악을 생각하고 그거보다는 나을 거라는 약간의 안도가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최악만 생각하며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조금 낫지만, 까마득한 계단에서 두세 계단 정도만 올라와있는 느낌이랄까? 바닥보다는 두세 계단이라도 올라와 있는 것이 낫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것 같다.
일 측면에서는 나는 나를 꽤나 믿는다. 그 믿음을 만들기 위해 깨지고 부서지는 상처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상처가 나를 더 강하게 했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마주치면 또 울고불고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어떤 일을 마주하든 지난번처럼 무력하게 순두부처럼 흐물거리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극복한 것이기도 하지만, 일의 성공과는 관련 없이 내 마음을 쉽게 무너뜨리지는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너지더라도 성공이나 나 자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예전처럼 한 번에 무력하게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일에 대한 내 '믿음'은 10년 가까운 경력이 만들어준 '독기'의 보호막이기도 하다.
일 외에 많은 측면이 있겠지만 믿음이나 좋아함을 떠올리면 나는 '외모'에 대한 것이 먼저 떠오른다.
어릴 때 나는 내가 '못생긴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언제 그런 관념이 박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진리였다.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내가 '못생기지 않았다' 정도까지는 왔다.
'못생긴 편이다'와 '못생기지 않았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나에게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나 자신을 '싫어하는 것'과 '싫어하지는 않는 것'의 차이는 자아상을 정말 다르게 만든다. 여전히 '나는 예쁜 편이다'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작은 차이가 나를 꽤나 긍정적으로 올려놓은 것은 사실이다.
외모에 대한 콤플레스와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데는 오랫동안 개인 상담을 받은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상담 초반부 어느 날인가부터 선생님이 내가 입고 온 옷이 예쁘고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편했다. 아직도 좀 남아있지만, 나는 칭찬(특히 외모에 대해)을 들으면 아주 마음이 불편해지고 거짓이라는 의심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래서 어느 날엔가 외모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 칭찬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믿음'은 혼자 생기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같은 말을 계속 듣고 마음의 벽에 금 간 틈으로 그것이 스며들어야 '믿음'이 된다는 것. 혼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서 믿는다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것. 특히 이미 자리 잡아버린 고정관념을 혼자만의 힘으로 깨고 나온다는 것은 힘들다는 말이 나에게 정말 위안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도 내가 '예뻐서 좋다'는 말을 한 거의 유일한 남성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새는 잘해주지 않지만... ㅠㅠ) 여하튼, 그 이후로도 선생님은 나를 만나면 내가 '예쁘다'라는 말을 해주셨고, 어느 순간 내 마음의 틈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나는 예쁘다' 까지는 못 갔다. 하지만 나는 '못생기지 않았다'에 가깝더라도, 아주 가끔은 나 스스로를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으니 된 게 아닐까?
나의 '믿음'과 '좋아함'은 '독기'나 '싫어하지 않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불신과 싫어함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그냥 자기 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챕터의 첫 문장을 생각한다.
"때로 나 자신과 스스로의 삶을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 일인지 생각한다."
나에게 귀한 말을 해주는 주변인이 얼마나 소중한 대상인지 또 한 번 되새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방법밖에 없다.
솔직히 아직도 긍정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기 어렵지만, 주변에 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뭐든 반복해서 하다 보면 스며들어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오늘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다.
"믿기 어려워 믿음이라는 단어를 쓴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희망을 품는다."
"스스로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당신을 믿어줄 수 있을 때다, "
의심하기에 믿는다. 확신이 없기에 희망한다.
나는 분명 내가 성장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을 '희망한다'
이 느리게 읽기도, 글쓰기도 무엇이라도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믿지 않으면 행할 수 없을 테니, 내가 이렇게 행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