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의 나는 한껏 힘을 주고 살아왔다. 내 몸은 언제나 긴장상태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힘 빼는 것이다. 성과를 이루라고 하면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120%의 노력을 해야 80%의 성과라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를 채찍질하고 다그쳐가며 달려왔다. 달려왔다는 표현이 딱 알맞다. 쉬는 방법도 모른 채 그냥 앞만 보고 달려왔다. 열심히 사는 것이 성공과 직결된다고 믿었고 성공은 나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는 성적과 장학금에 집착했다. 교양 시험을 치고 나오는 날 운 적도 있다. 전공도 아니고 교양시험이었는데. 열심히 준비한 시험을 못 친 것 같아서 지하철에서 펑펑 울었다. (근데 결과적으로는 잘 나왔다.)
디자인 전공생의 가장 큰 고비는 졸업 전시이다. 그 당시 나에게는 졸업 전시가 이 세상의 전부였다. 좋은 회사를 들어가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적으로 끝내야 했다. 졸업 전시 계획을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하는 첫날에 안 좋은 평가를 들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옥상에 올라가서 또 펑펑 울었다. 울고 있을 때 교수님이 나에게 와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안 좋은 평가가 아니었고 그냥 조언을 해준 것 이었는데, 나에게는 비판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보다. 더 좋아지기 위한 충고였는데 그때는 너무 마음이 힘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나 싶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대한민국 1%가 되겠다며 (남들은 다 웃지만, 나에게는 매우 진지한) 말하곤 했었다. 나의 직업에 대한 애착과 성공에 대한 욕심이 컸다. ‘디자이너로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은 사회초년생 때부터 내내 나를 두렵게 했다. 그래서 더 성공에, 일에 집착하였다. 형체 없는 두려움이 나를 감싸서 마비시키고 있었다. 사실 걱정하는 것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데 나는 걱정을 사서 했다. 회사와 나를 동일시 했다. 회사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때 나의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말. 다른 사람의 평가와 말들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결국 회사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오게 되었다.
일이라는 기둥이 무너졌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를 지탱해주는 기둥은 일이었다.
하나님이 아니었던것이다.
스스로 너무 놀랐다.
나는 왜 이렇게 일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었던 거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는 왜 스스로 이렇게나 힘을 주고 있었던 거지?
대체 나는 그동안 무슨 신앙생활을 한 거지?
다시 교회에 갔다. 다시 나를 믿음 위에 세워야 한다.
나는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가?
내 일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동안은 나 자신을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