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온전한 휴식
7,8월 두 달간 전력을 다해 일한 결과 ‘방전 상태’로 9월을 맞이했다. 평소에 하던 에너지 관리도 모두 소용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방향의 휴식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또한 9월 마지막 주부턴 새로운 일을 함께 병행해야 하기에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에너지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어 추석 연휴가 있는 한 주를 통째로 아무 생각 없이 온전한 휴식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다.
2. 갑자기 부산
갑자기 부산이 가고 싶었다. 그것도 내가 살았던 동네인 다대포가 그리웠다. 사실 나는 여태껏 나의 고향인 부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부산에서도 아주 외지고 좁은 동네인 다대포가 항상 갑갑하다 느꼈고, 빨리 어른이 되어 부산을 벗어나 서울이나 경기도권으로 독립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가끔씩 부산 여행을 가더라도 해운대나 광안리만 갔을 정도로 고향 동네를 그리워하지 않았던 내가 문득 다대포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신기했다.
3. 고향, 다대포
가끔 꿈에서 내가 살았던 동네의 한 장면이 뜬금없이 나타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실제로 고향에 가서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9월 중순임에도 역대급으로 더웠지만 이번이 아니면 방문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더워도 땀을 흘리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옛날에는 생각 없었던 골목들이 지금 와서 다시 보니 뭔가 더 낡아 보였고, 더 좁아 보였다. 그렇게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는데 고향 동네에서 바라본 노을 지는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좁고 답답하다고 생각한 동네였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올리면 무한하게 넓고,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서 난 그곳에서도 내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4. 낯선 과거의 나
나는 집에서 독립한지 16년이나 됐기 때문에 고향 집에는 나의 방뿐만 아니라 내가 쓰던 물건 자체가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 와중에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나의 물건을 몇 가지 발견하고 그걸 가지고 왔다. 20대 초반에 썼던 다이어리들과 아웃백 알바를 했을 때 좋은 성과나 칭찬을 받을 때마다 모았던 브로치들 그리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막 넘어가던 시절에 친구들에게 받았던 손 편지들.. 호텔방에 와서 씻고, 자기 전에 하나씩 읽어보았다. 과거의 기록에서 ‘20대의 나는 이런 느낌의 사람이었구나? 주로 이런 생각을 하던 아이였구나?’가 느껴지니 뭔가 낯설기도 하고,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기록도 10년 뒤에 보면 낯선 느낌이 들까?
5. 해운대 바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바다마다 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다 같은 부산 바다일지 몰라도 나는 다대포의 바다, 영도의 바다, 해운대의 바다.. 각각의 바다가 주는 느낌이 다르다. 그렇기에 다대포에서 몰운대 앞바다를 보았다고 해서 해운대의 바다를 건너띌 수는 없었다. 다대포와 해운대의 딱 중간인 부산역 근처에 숙소를 잡아 다대포를 다녀온 다음날에는 아침 일찍 해운대 바다를 보러 갔다. 심각하게 더웠던 날이라 바다 주변을 걷지는 못했지만 시원한 스타벅스에 앉아 아주 오랜 시간 멍을 때렸다. 조용한 오전, 반짝이는 해운대 바다를 보며 멍 때리는 시간. 생각보다 행복했다.
6. 화해의 메신저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며 멍 때리던 와중에 어떤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카톡 하나 쓰는 것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흔쾌히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앉은 테이블에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와서 자리를 잡고, 갑자기 자신의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약 2년 전에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원래 모시던 요양병원을 불편해하셔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드렸는데 그 과정에서 요양병원을 옮기게 된 이유와 결과에 대해 자신의 친여동생에게 상의 및 공유를 하지 않아 여동생이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이다. 당시 그 아주머니는 마지막 순간일지 모를 어머니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동생의 입장을 생각해 보니 충분히 화가 날만했고, 화해를 청했지만 동생은 언니를 원망하며 그 이후로 2년간 절연하듯 지내온 것이었다.
언니의 입장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마당에 자매끼리 절연하듯 지내는 것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편히 쉬지 못할 것 같아서 화해를 하고자 하는데 전화를 받지 않으니 글로 자신의 진심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런데 카톡 사용도 낯설고, 자신의 진심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도 잘 못하겠고 이래저래 답답한 와중에 용기 내어 처음 보는 젊은 사람(나)에게 민망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나 또한 처음 보는 아주머니의 사연에 깊이 몰입하여 최선을 다하여 동생분에게 진심이 가닿을 수 있도록 문장을 만들어, 카톡까지 전송해 드렸다. 그 이후로 동생이 카톡을 읽었는지, 답장이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진심으로 두 분이 꼭 화해하여 남은 인생 잘 지내면 좋겠다.
7. FLOW, 흘러가야 순환한다.
나는 가사가 좋은 노래는 선호한다. 특히 그 가사가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삶에서 흘러나온 고민과 생각에서 발현된 결과물이라면 유행과 상관없이 오랜 시간 듣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측면이 내가 아이유라는 가수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 운동을 할 때는 가사와 상관없이 텐션을 높일 수 있는 노래 위주로 듣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나의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을 갖기 위함이니 뭔가 텐션을 높이기 보다 생각이 와닿는 가사가 담긴 새로운 노래를 듣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정말 우연히 가수 온유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샤이니의 노래야 워낙 유명해서 가끔 텐션을 높일 때 듣곤 했다. 또한 그중에서도 온유의 음색이 정말 좋다고 생각해서 솔로 앨범을 찾아 들어 본적도 있었는데 딱히 가사나 멜로디 자체가 끌리지 않아서 계속 듣게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정말 우연히 새로 나온 온유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그동안 이 가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가사가 주는 에너지가 뭔가 한층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타이틀곡인 ‘매력’이라는 노래가 정말 매력 있어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들어보았다. 듣다 보니 앨범 속에 담긴 모든 곡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앨범 속 노래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흘러가야 순환이 된다’는 것. 그래서 앨범 주제가 ‘flow’였다.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메시지라서 노래 가사들이 더 깊이 와닿았던 것 같다. 어쨌든 온전한 휴식이 필요했던 한 주, 나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담은 새로운 노래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8. THE WINNING, 충격의 콘서트
무척이나 더웠지만 그럼에도 꽤 재밌고, 행복했던 부산 여행을 끝내고, 다시 광교로 돌아왔다. 토요일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유 콘서트에 다녀왔다. 5만여 명의 관객이 한 번에 모인 대규모 콘서트였기에 진짜 상암 일대가 마비된 수준이었다. 당연히 근처 공영 주차장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주차비가 비싼 경기장 내 홈플러스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화장실 한 번 가는데 거의 1시간 동안 줄을 서야 했으며, 주변 밥집, 카페 모두 만석이라 제대로 휴식할 곳조차 없었다. 아이유 콘서트를 보는 내내 즐겁고 황홀했지만 사실 그 이외의 시간은 정말 지옥이었다. 콘서트 규모가 큰 것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이번을 계기로 체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이유라는 가수 한 명을 보기 위해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버티며 5만여 명이 모였다는 것 자체에 굉장히 놀랍기도 하고, 충격적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싹 잊게 만들어 줄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나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함을 안겨 줄 수 있는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한 다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안겨준 충격적인 콘서트였다.
9. 꿈같았던 일주일
일주일을 마무리하며, 사진첩을 들여다보니 이 모든 순간들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자유를 느끼며 경기도 일대를 드라이브하며 돌아다녔고, 고향에서 향수를 느끼며 동네를 걸어 다니고 그리웠던 부산 바다를 감상했으며, 처음 보는 아주머니의 사연에 빠져들어 나름의 재능 기부를 했으며, 우연히 듣게 된 노래에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찾아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유 콘서트를 직접 보고 즐기고 왔던 한 주.
9월 첫 주엔 애를 쓰며 에너지를 채우려 해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지만 꿈같았던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내 영혼부터 다시금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은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치듯 휴식하는 것도 꽤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한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