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품고사는 것
9.
그렇게 열정이 가득했던 박편집장의 젊은 날도 돌아보면 쏜살같이 지나갔다.
시간은 잔인했다. 부도덕한 사회에도, 허둥대다 사회에 던져진 젊은이들에게도 시간은 지독하게도 공평하게 흘러갔다. 그 공평함이 잔인했다.
경직된 사회는 눈에 띄지 않는 속도로 천천히 나아갔고, 격변기에 휘둘려 젊음을 불살랐던 학생들의 꽃 같은 시간은 아깝도록 순식간에 흘러갔다.
'나는 청춘에 무엇을 했던가. 내 청춘에 죄를 지은 것이었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박편집장의 머리에서는 이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세상살이는 녹록하지 않고 변화된 세상을 위해 외쳤던 구호는 공허하게 끝나버렸다는 허탈함이 박편집장을 늘 괴롭혔다.
그 공허함을 고스란히 혼자 감당하고 세상에 던져져 자기 자리를 잡기까지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은 컸다. 시민단체 활동을 이어가는 친구들, 편집장처럼 언론계에 종사하는 친구들... 그리고 그때의 열정을 가슴에 조용히 묻고 현실을 열심히 사는 친구들...
시대의 아픔을 모른 체 하지 않았고 시대의 과오 앞에 용기 있게 목소리를 냈던 박편집장의 친구들, 가슴속 깊숙이 젊은 날의 외침을 묻어두고 이제 다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지금은 가끔 만나도 그냥 웃으면서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정신없이 세월이 흘러가다가 가끔 그날들이 떠올랐다. 서로의 가슴을 뜨겁게 하던 스무 살 친구들과 자신이 떠올랐다. 미숙하지만 용기 있었던 그들의 성장 스토리는 한순간에 지나갔지만 늘 잊히지 않았다. 영원히 사그라들 수 없는 그 세대의 아픔이자 언제든 다시 일어설 불씨였다.
명진아는 오랜만에 정기자와 함께 취재를 다녀왔다. 서예가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인터뷰이는 지역에서 유명한 서예가로 지금은 서예학원을 열어 일반인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있었다. 일반인들을 가르치는 학원풍경과 인터뷰 장면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정기자와 함께 서예학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잡지사 건물 앞에서 박편집장과 마주쳤다.
"어, 명기자, 정기자, 취재 다녀오는 거야?"
"네, 서예가님 만나고 왔어요. 편집장님은요?"
"아... 다른 사람들 바로 퇴근한다고 해서 나도 슬슬 내려오는 길이야... 두 사람 시간 괜찮으면 한잔 어때?"
"네, 좋습니다"
잡지사 건물 건너편으로 늘어서있는 시장골목 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섰다. 기다란 시장골목 끝에 해질 무렵 노을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명진아는 오늘따라 주홍빛 노을이 참 예쁘다고 생각하며 평소 자주 들르던 식당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박편집장 맞은편에 명진아와 정기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주와 맥주를 주문하고 안주도 곁들여 주문했다.
"성호님은 어떻게 됐어요?" 명진아는 자리에 앉아 물을 마시자마자 궁금한걸 바로 물어봤다.
"아... 성호씨... 어제 나하고 같이 장사장 만나고 왔어. 앞으로 단독으로 장사장을 상대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나하고 같이 다니면서 분위기를 풀어봐야지. 장사장도 일을 망치고 싶은 맘이 없다면 잘 해결될 거라고 봐. 다들 걱정하지 마. 잘되고 있으니까." 박편집장은 정기자가 만들어놓은 소맥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명기자와 정기자는 어때, 일은 이제 좀 할만해졌어?" 박편집장이 물었다.
"전 좋아요. 배울 것도 많고 일도 잘 맞는 것 같아서 재밌게 하고 있어요" 명진아가 대답했다.
"저도 다양한 사진을 찍어볼 기회인 거 같아서 좋습니다" 정기자도 대답했다.
"다행이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고.. 난 자네들 나이 때는 늘 조바심이 가득했던 거 같아. 빨리 뭔가를 성취해야겠다는 조바심, 얼른 세월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성급함이 있었어. 지금 이 순간을 천천히 다져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어. 시간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박편집장은 젊은 기자들을 보면 예전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저는 지금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는데요. 시간이 아까워서 잡아두고 싶을 정도로요. 정기자는 어때요"
"전 별로 그런 생각은 안 해봤지만 조급함은 없는 것 같아요. 원래 좀 느긋한 편이기도 하고요"
"그래 그게 좋은 거야. 난 세상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사람처럼 살았던 것 같아. 틈을 보이면 내가 잡아먹힐 것 같은 강박이 있는 시절을 살았어. 나를 위해 살 줄을 몰랐어.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박편집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야무지게 잘 사는 거 보기 좋아. 꿈도 알록달록 꿀 줄 알고, 뻔하게 살지 않아도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거, 사실은 부럽기도 해 ㅎㅎ."
"편집장님은 치열하게 한 길로 사셨잖아요. 전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요" 명진아는 잡지사에서 버텨온 박편집장이야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치열했는지는 자신 없는데... 하고 싶은 일이긴 했어.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더라고. 사이사이 수많은 갈등과 주저함이 있었어. 흔들릴 때마다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곤 했던 거 같아. 그 초심이 버팀목이 되어줬고... 난 가끔 내가 순수하게 이 일을 좋아서 했다면 길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역사와 약자를 위한 일을 하겠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그게 점점 옅어져서 지금은 잘 정리도 안되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날 지탱해 줬다 싶어"
"역사와 약자?"
"하하, 그냥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어. 내가 해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거... 지금은 좀 우습네. 어쨌든 그래도 그 명분이 날 여기까지 데려왔어."
"편집장님, 멋있는 젊은 날을 보내셨네요. 영화 주인공 같아요"
"그런 친구들과 함께 했었지. 나의 자랑인 친구들..." 박편집장이 추억을 돌아보듯 말끝을 흐리자, 명진아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요즘 사람들 얘기를 시작했다.
"저희 세대는 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들어해요. 대의 같은 거 코웃음 치는 분위기? 근데 웃기는 건요 엄청 야무지고 현실계산은 빠른 친구들이 꿈은 딱히 없어요. 돈과 욕망을 향해서 열심히 사는? 그런 분위기예요."
"근데 그걸 딱히 잘못 됐다 얘기하기도 그렇던데요. 모두 한 방향만 바라보는 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말이죠." 정기자가 요즘 젊은 사람들의 획일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 말했다.
"음... 맞아. 다 같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건 안 좋다고 봐.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야 크게 보고 넓게 볼 줄 아는 거 같아.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거는 기자직에 대한 자부심은 좋지만 특권의식은 없었으면 좋겠어. 주변에서 그런 분위기 조성을 하는 면도 있으니까 자기중심을 잘 잡아야 돼. 그리고 궁금한 게 있으면 날 잘 이용하고"
"네"
명진아는 편집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차리진 못했다. 하지만 박편집장이 이 일에 생각보다 진심으로 일하고 젊은 기자들을 키워주려 한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주는 든든한 소속감과 믿음을 주는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사회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큰 행운이라는 것도.
셋이서 즐거운 수다로 흥이 오를 즈음, 김성호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어. 여기들 계셨네요. 오늘은 여기서 저녁식사 하면 되겠다."
"성호씨, 어떻게 사무실 쪽으로 왔어?" 저녁시간은 거의 고객과 함께 하던 김성호였기에 박편집장이 김성호를 반기며 물었다.
"명기자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들렀는데 여기 있었네요"
"무슨 일인데요?" 명기자가 물었다.
"명기자, 내일 시간 되면 업체 하나 좀 만나주면 안 될까. 갑작스럽긴 하지만 홍보기사 필요해서." 홍보성 기사를 써주면 광고를 넣겠다는 광고주의 조건을 들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김성호는 생각했다.
"네? 홍보기사요?" 명진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박편집장을 바라봤다.
"성호씨, 그런 조건은 먼저 나한테 물어봤어야지." 박편집장이 김성호에게 나무라듯 말하고 명진아에게 이어서 말했다.
"명기자, 어떤 업체인지 한번 보고 기사구성 방향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간략하게 작성하면 될 거야."
광고의 중요성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으니 명진아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 박편집장은 홍보기사를 써보라고 했다. 명진아는 생각지도 못한 기사할당에 황당하고 박편집장에게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편집장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전 영업사원이 아니에요. 입에 발린 칭찬하는 광고기사는 싫습니다"
박편집장의 난감한 표정과 김성호의 빡친 표정이 한꺼번에 명진아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