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방식 <10>

편견을 넘어서 내 기준을 만들기.

by 목하

10.



명진아는 김성호의 당당한 태도에 더 화가 났다. 김성호가 아까부터 명진아에게 기분 나쁜 안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것도 못해주냐'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광고성 기사는 김성호 씨가 업체에서 자료 받아서 정리하면 되잖아요. 굳이 제가 업체를 만날 필요가 있나요. 저도 맡은 게 많고 아직 업무에 적응 중인데... 편집장님, 그렇잖아요"


김성호는 명진아가 너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명기자. 그건 나도 알지만 내 사정도 이해 좀 해주면 안 되나. 까다로운 업체고 광고만 받으면 우리 전부에게 좋은 일이잖아. 업체 사장이 좀 색다른 대우를 원하는 눈치여서 내가 기사 멋있게 써준다고 겨우 달래 놨단 말이야. 기자가 카메라 딱 들고 가서 인터뷰하듯이 몇 마디 대화도 좀 하고 사진도 몇 컷 찍어주고 그러면 광고도 쉽게 들어오고, 우리 잡지도 좋고, 다 좋은 건데..."


박편집장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명진아는 편집장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짓을 보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명기자 말도 맞아. 제대로 업무가 돌아가는 잡지사라면 사실 말도 꺼내기 힘든 부분이지. 근데 우린 이제 막 창간한 잡지사잖아.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라고 봐야지. 명기자 일정에 무리되지 않는 선에서 성호 씨랑 같이 업체에 한번 다녀오면 좋겠어"


아직 기자로서의 원칙대로만 하려 할 때라는 걸 박편집장도 잘 알고 있었다. 명진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기자가 홍보성 기사를 작성하는 일은 작은 언론사에서는 허다하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박편집장도 사실 잡지 만드는 일만 하고 싶지만, 잡지를 만들 자금을 마련하는 것에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의 반은 영업사원이 되어 광고주와의 관계를 맺어가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이유였다.


"명기자, 내가 같이 갈게요. 사진을 많이 찍으면 좀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정기자가 명진아를 달래듯이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명진아는 다들 한 마음으로 자신을 설득하려 들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어요... 일정 보고 말씀드릴게요..."

명진아가 식당을 나서고 정기자가 편집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얼른 명진아를 뒤따라 나섰다.


"괜찮아요?" 시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정기자가 명진아에게 슬쩍 물었다.


"괜찮죠 그럼. 좀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광고기사 쓰는 게 뭐 힘든 일은 아니에요... 편집장님이 기자의 특권의식 어쩌고 얘기한 게 이런 걸 얘기하는 거였을까 그 생각이 들어서요. 자존심 같은 거 버리고 일해야 한다는 말이었네요"


"편집장님이 꼭 그런 의미로 하신 얘기는 아닐 거예요. 사람들을 만나면서 혹시라도 그런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릴까봐 하신 말씀일 겁니다. 저도 그전에 그런 경험이 있거든요. 사진을 찍으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잡지사에서 온 사진기자라고 하면 저를 어려워하거나 대접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처음엔 그걸 선의라고 생각하고 몇 번 받았는데 그 이후가 영 찜찜해요. 이제는 얼른 일만 하고 뒷자리는 절대로 안 갑니다. 한두 번 받아보니 안 좋은 습관이 생기겠더라고요."


"어떤 안 좋은 습관요?"


"식사 대접은 당연한 거고 뒷돈까지도 주겠다는 사람이 많아요. 받기 시작하면 나중에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게 될까 봐 겁나던데요."

정기자가 손 내미는 시늉을 하며 키득거리자 명진아도 "에이, 설마요" 하면서 함께 웃었다.


"저도 잘 모르지만, 사람 사는 건 특별히 대단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명기자나 나도 이제 사회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니까 더 길게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부딪혀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정기자는 렌즈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보았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르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을 많이 느꼈었다. 살아가는 방식에 조금 차이가 있어 보여도 사람 간에 주고받는 관계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하게 통한다고 생각했다.


"정기자가 이렇게 진지한 건 첨 보는 것 같네요. 업체 만날 때 정말 같이 가주는 거죠?"

"당연하죠. 명기자도 가볍게 다녀온다는 맘으로 가면 될 거 같아요"

"오. 벌써 든든하네요"


어둠이 내린 시장골목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여서일까, 명진아도 스르르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정기자와 달빛이 주는 담담한 위안이 명진아의 의식을 더욱 또렷하게 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안정식은 급작스런 기온강하에 외투를 잘 챙기라는 TV 기상캐스터의 멘트를 상기하며 꽤 두툼한 코트를 챙겨 약속장소로 향했다. 오늘은 지역 문인협회의 터줏대감인 시인 김영수를 만나기 위해 김영수 작업실에 들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김영수 시인은 이 지역뿐 아니라 중앙협회에서도 인지도와 영향력이 있는 문인으로, 소문에는 지역문인협회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중심이라는 얘기가 돌 정도의 인물이었다. 60대 후반에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후학양성도 열심히라 그를 따르는 후배 문인들도 상당수라고 들었다.

안정식은 김영수 시인이 권위적인 이미지가 강해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문인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명확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기에 그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이 조직에 이렇게 잘 적응하고 심지어 관료적인 이미지임에도 창작활동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김영수 시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안정식은 오늘 드디어 소문의 주인공을 알아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작업실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개인 책상과 작은 회의용 탁자, 낮은 서가 3개가 전부였다. 책상 뒤쪽으로 바깥을 관망할 수 있는 가로로 길쭉한 창문이 있다는 점을 빼면 다른 것은 평범했다.


"어서 오세요, 김영수라고 합니다" 힘 있는 목소리였다.


명함을 내밀며 안정식도 인사를 나누었다.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창간잡지라고 하셨죠? 이 지역에서 잡지를 하신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요. 특히 문화예술 잡지라면 좀 더 대중적인 기사에 집중해야 독자를 잡을 텐데 문인협회의 얘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허허"


"도움이 되고 말고요. 저희까지 걱정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안정식은 문인협회의 행사와 향후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질문했다. 김영수 시인은 협회장답게 조직을 이끌어 가려는 의지와 선구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문인들이 개인작업에만 함몰되지 말고 가시적인 대외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혔다. 앞으로 협회의 운영방향도 그와 맥을 같이 할 것이라고 의지를 드러냈다.


인터뷰에 필요한 얘기는 거의 채웠다 싶을 때 안정식은 시인으로서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창작활동을 꾸준히 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협회운영과 병행하기가 어떠신가요. 창작활동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데요"


"개인적인 감수성에 방해가 될 때가 많지요. 조직의 입장에서 크게 봐야 하는 부분도 있고 문인들의 이익에도 반하지 않게 민감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들을 자주 접하다 보면 문학성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저도 시를 쓰고 있긴 합니다. 기자일을 함께 하면 시 창작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직업정신이 좀 흔들릴 때가 있더라고요. 요새는 거의 시를 못쓰고 있어서 고민입니다."


"음... 무언가 때문에 쓰지 못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핑계일 뿐이죠. 어떤 과정이 있든 내가 쓰는 일에 몰입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고된 일을 하고 녹초가 되어 돌아와도 쓰기에 몰입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악조건도 '쓸 수 없다'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건 없어요. 글을 쓴다는 건 모든 상황을 초월할 수 있으니까요."


"시인은 자신의 문학적 날을 항상 갈고 벼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일상에 묻히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요. 저는 그게 힘이 들던데요"


"문학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좀 예민한 안목이 필요하긴 하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는 능력일 뿐이지 어떤 직업보다 특별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기자님도 선입견을 버린다면 기자나 시인이나 마음을 글로 옮긴다는 면에서 동일하니, 사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일일수 있어요.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바꿔보세요. 오히려 현실적인 감각을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 같은데요"


시인의 작업실을 나서면서 안정식은 아팠다. 자신을 무참히 찔러대던 시인의 말 때문에 가슴을 움켜쥐고 싶을 만큼 아팠다.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핑계투성이 자신을 김영수 시인은 어쩌면 저렇게 정확히 간파해 내는 것일까.


사실, 안정식은 예전보다 더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글을 쓴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었다. 함축적이고 특별한 시어를 찾아 고뇌하던 자신의 모습이 요즘은 꽤 옅어졌다는 것을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일상적인 이야기에 감성이 곁들여져 안정감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안정식은 그 말을 모욕적으로 생각하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시인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갈래길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


안정식은 오늘이 자신에게 꽤 의미 있는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동안 두려움에 열지 못했던 시 습작노트를 오늘은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직면하는 고독과 두려움의 시간을 그대로 맞닥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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