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배경
그날은 학교를 졸업한 지 2년 만에 선생님과 동창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재수를 하고 있던 나에겐 가뭄 속 단비 같은 약속인지라, 들뜬 마음으로 그 자리에 향했다. 추억이 가득한 혜화, 반가운 얼굴, 어색한 인사, 주고받는 안부. 비는 추적추적 내리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사람이 하나 둘 모이자, 우리는 더욱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근처 치킨 집으로 향했다. 열다섯 살에 처음 만난 사람들과 스무 살이 되어 술잔을 기울이게 되니 마음이 이상했다. 누구는 이십 대의 중반에 더 가까워졌고, 누구는 이제야 성인의 첫발을 떼었다. 때로는 서로 미운꼴을 보이며 상처를 주고받았고, 때로는 웃으며 애정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닮아갔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과는 학교 다닐 때에도 인사 한두 마디 나눠본 것이 전부라 여전히 어색하기도 했다.
시간이 늦어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났고, 아쉬운 인사로 다음을 기약했다. 더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은 2차 자리로 이동했고, 이미 취한 나는 신나서 그곳으로 향했다. 가장 친한 여성 햇살이와 조금은 어색한 남성 소금 그리고 완전히 어색한 남성 푸주가 함께였다. (그들의 본명을 햇살, 소금, 푸주로 대체한다.) 자리에 앉아서 편입이니 애인이니 여행이니 살아온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세 잔 네 잔 다섯 잔 -
흡연실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도, 테이블에 엎어져 잠을 자기도, 햇살이 무릎에 몸을 쏟아 눈을 감기도. 나는 완전히 만취 상태였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술자리라, 나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술에 취할수록 술을 들이키고, 취할수록 사랑이 가득해진다. 주량도 모르는 나는 끝없이 자만했다. 필름이 끊겨본 적도, 토해본 적도 없기에, 취하면 취할수록 집에 가고 싶어 하기에, 술자리에서 한 번도 문제가 생겨본 적 없기에.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속이 너무 울렁거렸다. 토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벽에 기댔다. 집에 가자고, 집에 가야 한다고 하자 술자리는 마무리되었다. 푸주는 3차에 안가냐며, 더 마시고 싶은 눈치였다.
모두가 내가 집에 무사 귀환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똑바로 걷지도, 글자를 읽지도 못하는 상태였으니 당연한 염려였다. 햇살이는 애인과 약속이 있는 날이라 나를 데려다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함께 햇살이의 애인 집으로 가자 여러 번 물었지만 나는 모두 거절했다. 내 애인이 싫어할 것 같았고, 집에 가서 편안하게 자고 싶었다. 혼자 버스 타러 뛰쳐나가는 나를 잡아두고 셋은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그러다 나와 같은 방향에 사는 푸주가 말을 꺼냈다.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방향이 같으니 버스 타고 본인이 사는 곳 근처에 내려 나를 택시 태워 보내겠다고. 햇살이에게 노선을 보여주며 여러 번 안심시켰다. 그렇게 나는 푸주 손에 맡겨져 집으로 향했다.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때 내가 부모님에게 데리러 와달라 했거나, 그냥 햇살이 애인 집으로 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학교 다닐 때 친하지 않던 푸주는 술자리 내내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을 강력히 부정했고, 억울하다며 열변을 토했다. 오해를 푸는 걸 넘어 미안해지기까지 했던 햇살이와 나는 푸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