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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un 14. 2024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일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서평

돌처럼 쥐고 가는 것

 세상에 관한 나의 이해가 급작스레 뒤바뀌던 날들이 있다. 그런 날들은 마치 마음속 돌멩이를 꼭 쥐고 있듯이, 찜찜한 질문을 품은 체 실마리를 찾도록 한다. 열여섯의 하굣길, 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된다. 굵은 쇠사슬을 버스와 자신의 목에 단단히 감아 휠체어에 앉아있던 백발 남성. 그는 확고한 목소리로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고 있었다. 그를 응시하자 눈은 마주쳤다. 빵빵대고 항의하는 버스 기사, 핸드폰을 들어 촬영하는 사람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그 속에 섞여 한참을 멍청히 서 있었다. 벅차오름이었는지 겁이었는지, 그의 눈빛과 외침은 여운이 참 깊었다. 기숙사로 향하던 길, 떠듬떠듬 장애인 이동권을 검색했고 아주 쉽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였다. 혜화역에 위치한 학교 덕에 전장연 시위를 종종 만나곤 했다. 무장한 경찰들의 모습, 한 마디씩 욕설을 뱉던 사람들, 귀와 눈을 닫고 바삐 걸어가던 사람들, 나의 눈엔 장애인들이 그 속에 파묻혀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모습과 이야기 그리고 몸짓이 전시된 하나의 장면으로 느리게 흘렀다. 장애인에 관한 찜찜한 생각만이 어쭙잖게 내 안에서 엉켜갔다.

 시간이 좀 흘러, 나는 자폐스펙트럼을 지닌 한 아이와 일정 시간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 아이와 보낸 짧은 시간들 속 나는 이따금 이질감을 느꼈다. 그 아이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또 무슨 사고를 치진 않을까’하는 검열의 시선, ‘애가 좀 이기적이고 달라 네가 이해해’라던 판단의 말, 모든 것이 향하는 지점이었던 그 아이. 정말 ‘장애인’은 손상이 아닌 손상에 대한 차별로 만들어졌다. 나에게 그 아이와 보내던 시간은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이리 튀고 저리 튀며 규칙들을 헤집고 다니는 아이와 어쩔 줄 몰라하던 나, 그 과정 속 무지와 난처함만을 수없이 마주 했다. 그리고 지쳐갔던 것 같다. 도대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에겐 기꺼이 그러할 마음이 있는가?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일

 게의 걸음은 앞으로 향하지 않고 옆으로 향한다. 그것이 게에겐 올바른 걸음방식이다. 그에 대해 우리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떠한 존재가 자연스레 살지 못할 때, 장애는 발생한다. 장애는 손상이 아닌 사회가 구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 그리고 자연이란 무엇일까? 어떤 자연은 하나의 관념으로서 동물과 장애를 억압한다. 그러나 어떤 자연은 장애와 동물, 더 나아가 지구 행성 속 모든 존재의 어울림을 제시한다. 자연에 관한 관념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떤 몸을 ‘살기 적합한 것 혹은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지, 또한 어떤 몸을 ‘착취하고 소비하고 먹어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를 바탕으로 철학 이론, 정치 체계 그리고 견해들은 구축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판단과 구분을 정당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정당화하는 것일까?

 장애인을 향한 비장애 중심적 견해는 만연하다. 장애인이 하는 것이라면 뭐든 감동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간주하는 ‘슈퍼불구’ 서사, 장애를 의료적 이상 상태로 바라보며 치료가 필요한 몸으로 간주하는 ‘장애의료화’, 장애인의 삶이 비장애인의 삶보다 현저히 질이 떨어진다는 추측들. 이러한 관념은 장애인이 사회에 참여하고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도록 전혀 돕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장애를 가치 절하한다. 장애란 어떤 사람이 떠안는 정체성이기도 하고, 투쟁의 조건이기도 하고, 해방을 발견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데 활용되는 개념이기 더 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장애는 몸으로 살아내는 현실의 일부분이자 삶을 살아가 는 독창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장애를 통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 우리의 이성, 움직이는 방식,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과 같은 것에 질문을 품게 된다.

 자연(본성)은 동물 착취 및 상품화를 정당화하는 일에 도구로 쓰인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인간 본성과 자연의 섭리를 언급하고는 한다. 만약 그러한 욕망과 착취가 ’인간 본성‘의 일부라면, 삶의 방식을 질문하고 우리의 습을 바꾸는 일 또한 ‘인간 본성’을 구성한다. 문명 전환의 시대라는 의제와 자연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 우리는 자연을 도구 삼아 착취와 억압을 일삼는 일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동물이 장애를 갖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산업적으로 사육당하는 동물에게 장애는 흔하고 심지어는 불가피하다. 특히 축산동물은 신체적 극한에 이를 때까지 품종개변을 당한다. 신체적 손상 외에도 타박상, 만성질병, 정신질환 등을 경험한다. 인간은 동물의 장애에도 비장애 중심주의적 사고를 투사한다. 장애가 다른 동물들에게 동정이나 무시 중 어느 하나만의 감정을 일으킨다 생각하며 관념을 되풀이한다. 이런 모든 서사가 전부 거짓은 아니지만, 장애에 대한 인간의 고정관념을 동물에게서 읽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른 종들에게 장애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른 동물들이 장애와 어떻게 상 호작용 하는지도 훨씬 많이 고려해야 한다.

 의존은 무능력하며 자립은 중요하다는 사회적 통념 속 장애인과 동물은 의존적 존재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자립은 그 무엇보다 의존적이다. 혼자서 또는 도움 없이 어떤 일을 해내는 것이 자립이 아니고, 서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으며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 가는 힘이 자립이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돌봄 속, 상호 의존적으로 살아간다. 장애인과 동물은 의존이 모욕적이라는 통념과 싸워야 할 뿐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것, 비정상적인 것을 규정하는 사회의 고정관념과도 싸워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 존재들은 지금껏 다양한 방식으로 짐승 그리고 짐으로 제시되었다. 유사한 삶을 유일하게 살아내며, 모두가 연결되어 살아가는 우리. 서툴고 불완전하게 서로를 돌 보며 어울려 살아간다. 어울려 살아감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서로 의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며 나아간다.


미세한 이야기들

스스로를 ‘알맹이 찾아 나선 껍데기’로 정의한 것은 다다른 출발이었다. 무엇보다 찾아 나서지 않고 품는 일, 들여다보는 일임을 아는 것. 자연스레 살고 싶다는 마음을 새기고 또 새긴다. 마음을 품고 질문을 품은 지금 여기는 풍요롭다. 한 발짝 걸음을 옮겨본다. 나는 종종 봐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봐준다, 바라봐준다. 파도가 치듯 펼쳐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일. 골라서 묻히고 불편하여 지워내고 또 묻히고 또 지워내고의 반복. 나는 어리고 자란다. 묻혀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내가 자라는 것이 변화 아닐까 그렇다면 성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또 한 발짝 걸음을 옮긴다.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일. 내 삶을 지탱하고 있는 많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겠다. 하나의 세상을 바탕 삼아 미세한 이야기들은 펼쳐지고, 각각 유일한 세상을 꾸린다. 동시에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 마음에 돌처럼 쥐고 가는 것들이 있다. 마치 실로 맞잡은 일이라 생각된 다. 놓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툭툭 나에게 보내는 신호는 금세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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