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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치 Jun 19. 2024

사춘기와 자해청소년

부모님을 이해하는 일과 나의 결핍을 마주하는 일

 비가 추적추적 내려 흙 내음이 코를 스친다. ‘너는 참 복 받은 아이야’ 내 모든 펼쳐짐을 나누던 선생님이 툭 던진 말이다. 정말 그렇다. 용인에서 서울, 서울에서 순천 그리고 지금 여기. 어떤 선택이나 행동은 그 의미가 선명해지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의미들이 나를 지금 여기에 살도록 하는구나.

 아주 어리던 나에겐 늘 바쁜 아빠와 마음이 아프던 엄마, 꼴통 여동생 한 명이 함께였다. 어떨 때는 불안을 느꼈고 어떨 땐 사랑을 느꼈다. 그 시절을 그리 보내니 사춘기 때엔 분노와 불안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되어있었다. 그 분노는 나에게로 향했다. 방 안에 틀어박혀 끝없이 자해를 했다. 피를 질질 흘리며 아빠에게 정신병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나를 해하는 일이 부모님에게 상처가 되길 바라는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그렇구나, 너 마음이 아프구나’ 아빠는 내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었다. 정신적 성장이 몸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는 시기를 사춘기라 한다. 딱 그 수준이었다. ‘나를 바라보고 귀담아줘 나를 사랑해줘’하는 몸짓. 어린 나는 자라지 않은 채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어느덧 자란 나는 ‘내 엄마 아빠’가 아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만날 수 있었다. 그들도 아픈 사람이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춘기를 돌이켜볼 때면 나에 대한 연민과 부모님에 대한 연민이 든다. 내가 갈구하던 그것은 부모님의 몫이 아니었다. 나는 방법을 몰랐고 그 시절 우리의 최선이었음을 지금의 나는 이해한다. 내가 배우고 선택하는 모든 과정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된다. 그 길에서 나의 결핍과 아픔을 마주할 때면 종종 원망하고 종종 보듬어준다. 한 번은 사춘기 시절의 나를 끊임없이 떠올려보았다. 어느 순간 아쉬워하는 나를 보았다.

 펑펑 불꽃이 자연스레 터지다가 그럴싸하게 정돈되어 적당히 끝난 나의 사춘기. 그 흔적을 발견할 때면 그 진솔함과 꿈틀거리는- 자연스러운 마음들에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내 알맹이는 어떤 모습, 어떤 빛깔을 하고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고 싶은데 스스로 규정한 것, 묻혀둔 생각들이 큰 방해가 된다. 연극 선생님께선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썩은 동아줄을 불잡고 있는 것과 같은데 왜 놓질 못하니” 공동체에서 보내는 시간 속, 내가 나로부터 아주 조금은 해방된 것이 느껴진다. 엄마는 지영이 어린 시절의 성격과 표정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며 좋아하시곤 한다. 의무감 혹은 오글거림이란 이유로 가둬두고 제압한 면들을 그저 놔두고 싶다. 온전히 닿아가는 데서 오는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싶다. 자연스럽게, 나의 속도로 풍요로이 살아가길 바란다. 그것을 바라고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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