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극락왕생>이 보여주는 신화의 활용 방식
이 시대의 신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흥행을 올리고 있는 마블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20여 편의 영화 10여 편의 드라마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북유럽이나 수메르 신화, 아프로퓨쳐리즘(Afrofuturism)과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물론이고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과 같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회문화적 요소들까지도 포섭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21세기의 새로운 신화를 재구축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신화의 가치는 태고부터 이어지는 원형적 상징(Archetype Symbol)들에 대한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반응이라는 신비감에 고정되지 않는다. 21세기에 신화는 오히려 일상적이고 동시대적인 것들과 만나 가치를 인정받는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이러한 기조들이 일반화되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신화를 활용해 성공한 서사들을 보면 신화에 대한 전통적이고 원형적인 가치들에 집중하기보다는 신화의 세계관이 주는 설정을 활용해 일상의 문제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룬 작품들이 많다는 것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의 현대적 가치 판단에 인상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작품이 고사리박사의 <극락왕생>이다. 작품의 근간이 되는 세계관은 불교 세계관이다. 이제껏 한국적인 신화 요소를 활용한 작품들은 대부분 그 근간이 불교의 세계관으로부터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신화로는 단군신화가 있지만, 이는 민족성을 고취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게다가 신화가 대중적으로 확산한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불교는 한국에 1600여 년 동안 영향을 주었던 사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민족성을 소거한 한반도의 구성원들에게 집단 무의식으로 작용하기에 쉬웠던 것은 오히려 불교 신화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 신화가 한국적 신화라고 의미화하는 것 역시 적합하지 않다. 불교 신화는 해당 사상을 공유한 문화권을 횡단하면서 다양한 가치와 문화적 요소들을 내포한 거대한 세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를 한국적이라고 규정하고 의미부여 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다. 하지만 <극락왕생>은 한국적이다. 불교 신화라는 세계관이 철저하게 현대 한국의 일상을 설명하고 있기에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마블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각종 신화적 요소들을 끌어모아서 21세기의 전 지구적인 새로운 신화 구축에 활용하고 있다면, <극락왕생>에서는 불교 신화의 세계관과 한국의 설화들을 활용해 현대 한국의 일상과 그 안에서 평범해 보이는 한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극락왕생>에서 귀신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자신이 지냈던 고3이라는 일 년 동안을 보장받은 주인공 자언은 이러한 불교 신화의 세계관이 제공하는 다양한 요소들 위에 축조된 인물이다. 일상이라는 현실의 세계만이 존재하던 시절에서 인간도,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 천상도, 수라도의 육도로 구분되어있는 사바세계로 인식의 지경이 넓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 확장에 따른 다양한 설정들은 전적으로 불교 신화로부터 받고 있다. 특히 사건을 만들어내는 귀신들에 관한 이야기나,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호법신이나 보살과 같은 인물들의 설정 또한 신화로부터 유래한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제약도, 문제의 발생도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극락왕생>을 단순히 불교 신화를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만 여길 순 없다. 이 작품은 불교 신화라는 세계관을 활용해 일상이라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사실 일본 만화에서 2000년대까지 꾸준하게 보여주었던 방법이기도 하다. 퇴치 대상이라고 여겼던 요괴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던 <나츠메 우인장>이 보여주던 방식과도 비슷하다. <극락왕생>은 어디까지나 합정역 귀신이었던 자언의 고3 생활을 통해서 일상이라는 것의 난해함과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부산이라는 지역의 특성, 고3 여학생이라는 상황에서의 일상은 그저 지나왔을 당시에는 지난하고 치열한 삶이지만 인식의 지경을 넓히고 돌아가 보면 다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로즈메리 잭슨이 이야기했던 환상의 강력한 기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이면을 들춰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현실 그 자체를 전복할 힘을 제공하는 것 말이다. 지방이라는 장소적 한계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이 가지고 있는 소수자성 그리고 수험생이라는 제약투성이의 시기적 한계들은 환상을 통해서 해체되고 다시 재정의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관통하고 있는 일상에 대한 새로운 정의들이 도출된다. 그것은 친구와 가족 같은 대상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고, 사랑과 우정, 타인을 대한 방법과 같은 관계 맺기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상의 다양한 의미들은 거리를 두고 낯설게 함을 통해 통찰할 수 있고 21세기에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환상이라는 매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극락왕생>은 이미 다양한 서사에서 활용한 서구의 신화적 세계관이 아니라 아직은 조금 생소할지도 모르는 불교 신화의 세계관을 차용해 낯설게 하기를 강조했다. 그리고 한국의 집단 무의식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던 불교의 세계관들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통찰하는 게 조금 더 친밀감을 주기도 한다. 불교의 교리를 모르더라도, 신화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극락왕생>에서 자언이 살아내고 있는 또 한 번의 생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신화라는 거대한 세계관이 일상에 맞닿았을 때 일어나는 일종의 화학작용이다.
이 글은 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하는 만화 전문비평지 <지금, 만화> 4호(2019 Autumn) Critique 섹션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