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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yoon L Jul 28. 2024

외갓집

나의할머니

#집

 

나의 외갓집은 경기도 수원 발안 이란 시골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농사꾼이셨기에, 사방은 다 밭이고 논인 그런곳이였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겠지만…


일년이면 몇번을 가던 외갓집은 그 당시 느낌이 산넘고 강건너 하루 종일 가던 길이였는데, 사실 1-2시간 남짓했던 거리였다고 한다.


우리 외갓집은 정문으로 들어가면 디긋자 초가집이였다.  정면으론 마루를 중심으로 방 두개가 있었고, 디긋자의 다른면에는 사랑방과 헛간이 있었던거로 기억한다.  그러고 그 맞은편은 부엌이였고, 커다란 가마솥이 두개인데, 나무를 태워서 가마솥을 달구고 그거로 할머니는 못하는 음식이 없었다.  


부엌에는 밖으로 향해져있는 문이 하나 더 있고, 그옆에는 요즘말로는 팬트리라고 하는 창고가 있었다.  엄마말로는 어릴적 거기에 꿀이며 조청이며 그런걸 할머니가 뒀어서 몰래몰래가서 한숱갈씩 몰래 떠서 먹었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가면 제일커다란 방에 온식구가 다같이 잤다.  우린 이모네 식구들과 같이가서 대충만 따져도 대략 열명은 넘는 식구들이였다.  그 식구들이 다같이 안방에 다닥다닥 이불을 펴고 눕고 남자어른들은 다 뚫려있는 마루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잤다.  


난 그게 너무 옛날이여도 내가 직접겪은 이야기기에 눈에 보이는듯 너무 자연스러운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난 옛날사람이였구나…역사책에서나 볼만한 장면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다보면, 새벽녘, 그때도 잠없던 나는 어른들의 코고는소리 할머니의 움직이는 소리에 깨서 마루에서 멍떄리고 있을때즘,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새벽이슬 송송이 맺혀있는 참외, 오이, 가지 이런것들을 한광주리로 가지고…

“지윤이 왜 벌써일어났어?” 라고 커다란 짚모자를 벗으면서…


할아버지는 그냥 할아버지인줄만알았는데, 그때 아마 나의 할아버지는 60세즘이셨을꺼다.

요즘 60이라면 아직 리타이어도 할까말까한데 그때 내가 본 할아버지는 너무너무너무 늙은 노인네였다.


우리가 잤던 큰방을 앞 마루를 건너 작은방에는 증조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어떤이유로 항상 고개를 흔들거리셨는데, 그래서 증조할머니를 우린 도리도리 할머니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말이 별로 없으셨고 항상 그 방에서 누워계시거나 앉아서 이가 다빠진 입으로  “지윤이왔써???” 라고 고개를 흔들흔들 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한 8-9살됐으려나, 할머니는 그때 돌아가셨는데 어른들의 말로는 굉장히 건강하게 장수하셨다고 하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그 방에 하루에도 몇번씩 들어가 그 늙은 할머니에게 먹을것도 갖다 같이드시며, 농담도 하고, 화도내고 잔소리도 해서 할머니를 웃게도 화나게도했다.  ‘아 할아버지는 왜 저 늙은 할머니에게 저러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할아버지에겐 그냥 “엄마” 였던거다.  

내가 이나이 되도록 엄마랑 싸우고, 욕먹고, 등짝맞고 그럴줄 그땐 몰랐지…


작은방 앞에도 또 하나의 가마솥이있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증조할머니의 방바닥 온도를 의한 부뚜막 이였던거같다.  증조할머니가 풀 센텐스로 큰소릴 내던때가 있었는데, 그건 나의 할머니이자 그녀의 며느리에게 무언가 불만이있으셨을때였다.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부뚜막 관련이였던거같다.

 

나의 외할머니는 몇대손 유복자의 외아들에게 어린나이에 시집을 가셨다.   가난했던 할머니의 친정보단 조금 나은집으로 어릴떄 보내졌으리라…

시집오고나서 첫생리를 했다고 하니 한  열서넛이나 됐을까…그런나이에 시집와 연달아 딸만 셋을 낳자, 할아버지는 새 장가를 드셨다.  할머니가 있는채로…


내가 어느정도 철이들고 할머니랑 대화가 잘 통햇을즘,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

 

“넷쨰낫는데 옆에선 경사가 난거야.  결국 또 딸이여서 할말이 없었지만, 내가 애를 낳는 방에서 혼인소리가 다 들렸으니  맘이 어떻겠어.” 라며 할머니는 말했다.  


그떄 나은 그 딸이 나의 엄마다. 넷째, 또 딸.

그떄는 할아버지가 농사를 전적으로 크게 할때였고, 농사를 같이 지을 아내와 아들이 필요했을터다.  

나의 할머니는 전쟁때 한쪽다리를 잃으셨다.  피도 너무 많이 잃고 한쪽다리를 잃었으니 농사를 할수 없었으리라…


난 그냥 자기전에 들려주는 할머니의 역사 이야기같은,  옛날 이야기로 들렸고, 나의 외가는 원래 할머니가 두분이여서  그냥 그런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직도 뇌리에 남아 토씨하나 안틀리고 기억나는거보면 나에게도 충격이였던거같다.


아마도 다들 그러고 사느니, 여자는 이런거 다 참고 사는거니….라고 참았으리라.


나의 남편이 깃을 세우고 한복을 입고, 내 앞에서 새장가를 드는 척박한 팔자라니…


커서 생각하니 너무 충격이였지만, 남편이 생기고 생각하니 한쪽다리를 잃은 상태서 출산을하고, 고스란히 그 혼례소릴 들었을 나의 할머니의 그때 심정은 차마 가늠도 안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할머니는 정말 특별났다.

누가 저런 히스토리를갔고있겟냐만…저런 히스토리를 가지고도 가정은 평온했고,  자식들마저 서로 형재애가 좋았다.

 

“지윤아, 너가 속이 상해서 다른사람에게 다 퍼부우면, 좋을거같지? 다른사람 아프게 하면 내 맘도 또 아퍼.  차라리 그냥 혼자 속상하고 말어” 라고 할머니가 말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할머니의 저 가르침은 듣고 있지않지만, 아마 그게 할머니가 살아온 길이였을거라고 생각한다.  다른사람 맘 아프게 할때 할머니도 아팠구나… (할머니 난 별로안아퍼 그게…)


바보같은 나의 할머니..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였기에, 막내딸을 도우러 할머니는 우리집에 오셨고 그렇게 태어난 막내딸에서난 손주가 태어나자부터 열너덧이 될때까지 난 할머니에게 자랐다.


할머니는 나에게 할머니 이상, 엄마였고, 친구였고, 스승이엿다.


2004년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 처럼 슬픈 사람이있었을까…

나에겐 부모 그 이상이였던 할머니.

내가 하는 말은 모든지 맞고, 내가 드리는 선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비싼거고,  내가 하는건 누구도 못하는 일이였던 나의 할머니.  나의 자존감은 모두 할머니에게 온것이였다.


파라과이 이민중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병에 위중함으로 한국을 돌아가셔야했다.  그렇게 대못을 박은 할아버지였어도,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하셨던거같다.


그런 할머니에게 “할머니 가면 나 엄마랑 어떻게 살어?”라고 울면서 말했다.  할머니는 “네 엄만데 왜 못살어”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


나와 할머니의 본딩은 유별났다.

사촌들도 할머니에게 효도할일이있으면 꼭 내게 와서 생색을 냈다.  너의 할머니에게 내가 이렇게 잘했다. 라는 식으로…


할머니는 언제나 주름치마에 니트나 블라우스를 코디를했다.  할머니는 그 옛날사람이 멋을 아시고 얼마나 까탈스런지, 언젠가 캐나다 다니러 오셨을때 치마만 20여벌 싸오신분이다.  거기에 깔맞춤할 윗도리와 신발까지 더했으니 …


할머니의 옷에서 나는 냄새가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나 강박증수준으로 깨끗한 분이여서, 옷이며 행주, 걸레에도 얼룩하나가 없었다.  그런데 또 담배는 태우셨어서, 할머니 옷에서는 항상 깨끗한 비누냄새와 체취 그리고 천의 냄새가 섞인냄새가 났다.  난 지금도 눈을 감고 맡으라고 할머니 냄새를 가늠할수있다.


할머니는 그 연세에도 책을 놓치않으셔서, 손주들도 가장 많이 하던게 책선물이였다.  학교 한번 안가보고도 참 유식했던 나의 할머니.  입셍로랑 담배 태우던 나의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시곤, 난 한 5년쯤? ‘할머니’ 란 단어자체를 입에서 발음못했다.  입보다 눈이 먼저 반응을 해서…

이십여년쯤 지나니 이제 할머니란 주제로 난 글을 쓰면서 울지 않치만, 여전히 소프트 스팟은 있기에, 옆집 할머니의 수다두 끊지 못하고 강한 햇빛 고스란히 받으면서 20분을 수다를 들었다.

 

집하면 생각나는 나의 외갓집. 그러고 외갓집하면 생각나는 나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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