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글
내게 남들과 다른 특이한 이력이 있다면 파라과이 이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과 사건도 많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년 동안의 그곳에서의 이민기를 베이스로 한 소설을 써보겠습니다.
뭐 그렇게 쓰고도 또 쓸게 있냐, 또 파라과이냐, 식상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의 유일한 특이한 이력이고, 이렇게 라도 그 특이한 이력을 남겨놓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상상으로만 아니 내 안에 그 뻥쟁이의 재량껏 널을 뛰기에는 영 부족할 거 같기에, 쓰는 사람의 경험과 뻥쟁이의 뻥을 알맞게, 골고루 아니 어쩔 땐 이것이 과하고 다음번엔 저것이 과하게 이렇게 컬래버레이션을 해보려고 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경험담이 나올지, 내 안의 뻥쟁이의 재량은 어디까지일지 아직 그 무엇 하나 계획이 서 있지도 않습니다.
그 어떤 거 하나 계획이 있진 않지만, 이미 써놓은 신비로운 나라 파라과이 이야기들이 한 곳으로 흐르게 혹은 연결되게 해보고 싶습니다.
가제 ‘낭만의 나라 파라과이’는 라파초라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를 책표지로 한 파라과이를 설명한 여행설명서였습니다.
‘참 말도 안 되게 제목도 지었네 ‘라고 언젠가 우리 식구들끼리 깔깔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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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영겁의 시간
“엄마, 이제 다 왔어?”라고 동생이 벌써 이십여 번은 물어본다. 엄마는 견딜 수가 없이 길고 긴, 아직 반에 반도 못 왔다는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하기가 미안해 “조금만 더 참아보자”라고 말했다. 1990년 대한민국에서 남미 파라과이 까지는 36시간이란 비행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탔던 비행기는, 김포국제공항에서 일본 나리타 공항으로, 몇 시간 연착 후, 미국 엘에이에서 또 연착을 한동안 한 후, 브라질 상파울루로 향했다가, 거기서 작은 비행기로 갈아 탄 후 드디어 파라과이 아순시온 이란 우리 가족의 목적지로 도착을 하는 일정이었다. 말이 36시간이지 어린 정은이의 시간으론 영겁의 시간같이 느껴졌었다.
우리 식구는 엄마, 아빠, 할머니, 나와 내 동생이었다. 엄마는 처녀 적에 프랑스 회사에 취업을 했었고 어떠한 교육을 받으러 프랑스에서 2-3개월 생활을 했었다고 했다. 그때는 해외에 나간다고 하면 온 가족에 사돈에 팔촌까지 다 같이 공항에 나와 배웅을 했었다고 했다. 엄마를 제외하곤 우리 식구는 해외는커녕 제주도도 안 가본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는 맞벌이하는 막내딸 (나의 엄마)이 안쓰러워 손주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같이 살았다.
그런 할머니와 나는 아주 아주 특별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부모 이상, 친구며 스승이었다. 그렇게 우리 식구에겐 없어서는 안 될 할머니기에 그 척박한 이민을 할머니도 같이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만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배움이 너무 좋아서 혼자 글을 배우고, 책이 너무 좋아서 그 연세에도 책을 항상 손에 두고 사셨다. 그래서 그런가 할머니는 모르는 게 없었다.
일본 나리타 공항, 트렌스퍼였지만, 출입국 신고를 했어 야했을 때, 영어도 못했지만 일어는 더더욱이나 모르던 우리 식구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할머니가 자꾸 경고음이 뜬다. 그들은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우리 식구들 멈춰 세웠고, 영언지 일언지 알 수 없는 말로 우리 다섯 식구를 에워싸고 여럿이서 말을 물어왔다. 아빠나 엄마나 난처한 얼굴이 역력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웬만하면 화를 내는 적이 없는 할머니가 얼굴이 빨개지더니 갑자기 일어를 하신다.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던 할머닌데 그것도 굉장히 큰 목소리 일어를 능숙하게 하신다. 마치 그들을 꾸짖는 거처럼. 그러더니 치마를 들어 올린다.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고상한 나의 할머니가 남들 앞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 식구는 눈이 동그래졌다. 치마를 들어 올린 할머니는 치마 속 깊숙이 감춰진 의족을 보인다. 할머니의 의족을 보고 그들은 혼난 아이들처럼 얼른 우리 짐을 자기네들이 싸서 보낸다.
그때까지도 우린 얼떨떨해서 서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어딘가에 자리를 만들어 다섯 식구 쉬게 되다,
“엄마 아까 뭐라고 한 거야?”라고 엄마가 할머니에게 묻는다.
“내가 전쟁에 다리를 잃어서 그래!”라고 말한 거야.
“엄마, 일본말 그렇게 잘했어?” 엄마도 몰랐던 것이었다.
“다 알지. 그 자식들 뭐라고 뭐라고 말하는 게 다 들렸어 “라고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는 전쟁 때, 밭에 있던 지뢰를 밟아 한쪽다리를 잃으셨고, 그 다리엔 쇠로 만들어진 의족이 있었다. 그 의족에서 나던 경고음이었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의족때문에 항상 다리를 절었다. 그 의족을 빼면, 반만 남은 할머니 다리는 의족보다 작아 여러 겹으로 골무 같은 덮개를 씌웠다. 할머니는 그걸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다리를 무장해제 후 혹시 사위라도 방에 들어올라치면 할머니는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얼른 의족을 끼우고 블라우스에 치마, 머리까지 매만지던 분이 였다.
자기 직전, 할머니는 의족을 빼고, 하루종일 써서 벌게진 반만남은 다리를 쓰다듬고 연고 같은 걸 바르셨다. 하루종일 할머니의 치마 속 깊이 감춰져 있던 그 반쪽다리가 비로소 공기를 쐰다. 할머니는 어쩔 땐 거기에 반창고를 칭칭 감기도 하는데, 그 쿰쿰하며 멘솔냄새가 나던 할머니의 의족 분해시간. 그 시간에 할머니는 마치 상처 난 부분을 핥고 매만지는 상처 난 우아한 백로 같았다. 모두 잠든 깜깜한 밤 홀로 앉아 상처 난 다리 한쪽을 매만지던 시간이 할머니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그러고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일본이름도 있었지만, 끝까지 고집해서 쓰진 않았고, 일본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릴 때 쓰고 더 이상 쓰지 않아 모를 줄 알았는데 본인도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을지 몰랐다고 하셨다.
우린 항상 조용하기만 한 할머니가 누군가를 크게 혼내는 것도 처음이고 그것도 일본어라니…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우리 식구 다섯이서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