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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프란 곽여사 Aug 10. 2023

5. 40대의 첫 달리기-내 모습 보지 말걸 그랬어.

그냥 정신승리하면서 살걸 그랬어

2023년 4월 8일, 응급센터에서 두 번째 진료를 마치고 집에 뛰어서 돌아온 날, 나는 달리기로 결심했다.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고 찬물에 씻어 기름기가 그대로 낀 접시 같던 마음도 뽀득뽀득 깨끗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막연하지만 확고한 확신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얄팍하다.
작은 결심 하나만으로도 어제와 오늘은
지옥과 천국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두 번째 진료를 한 시점은 내가 고혈압약을 처음 복용하고 20일이 지난 시점이라 그동안 나름대로 운동을 한답시고 운동복을 몇 개 구입해 놨었다. 주로 육덕진 허벅지와 중년여성의 상징인 두둑한 Y 라인을 가릴 낙낙한 티셔츠다. 출산도 안 했건만 왜 거기만 두둑해진단 말인가? 두둑해지라는 지갑은 얇아지고 보기 싫은 그곳만 두둑하다. 하여간 청개구리가 오백마리는 꼬이는 게 내 인생이다.  다음 날, 낙낙한 길이의 흰 셔츠에 집에서 입던 닳아서 씨쓰루가 된 검은 레깅스를 입고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이키 광고를 보면 온몸이 탄탄하고 반질반질 기름칠이 잘 된 모델들이 다리와 배 근육을 과시하며 뛰는 장면이 나온다. 기분만큼은 그 모델 뺨치게 박차고 나갔다. 온몸을 펄떡이며 뛰는 혈관들과 그 혈관을 타고 도는 엔도르핀, 살아있는 에너지가 활활 타오르는 나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훗, 그건 내 생각이고.

힘들어 죽는다

현실은 지독했다. 나는 집 앞 두 블록을 지나 있는 모퉁이를 채 돌기도 전에 숨이 턱에 차 무척 헐떡거렸다. 너무 헐떡거린 나머지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간을 따지면 2.5분 정도의 거리였다. 한 마디로 나가자마자 체력이 바닥이 난 것이다. 게다가 혈압이 높았기 때문에 금방 두통이 시작되고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그래, 난 아디다스 신발을 신었는데 나이키 모델처럼 뛰면 안 되겠지. 그냥 걷자. 나는 비칠 비칠 헐떡이며 걷기 시작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비록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만큼 힘겹긴 해도 나는 이미 이 달리기 여정을 시작했다는 반가움과 앞으로 바뀔 내 모습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아 어느 코스로 돌아야 하는지 몰라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았다.

너무 흉해서 머리내렸는데 그래도 커버 안됨 ㅎㅎㅎ


입으로 내장을 쏟아낼지언정 나는 뛰리라!


그렇게 힘겹게 걷다가 비칠 비칠 뛰다가 속칭 '걷뛰'를 하다 보니 대로에 있는 통유리창이 아주 멋진 건물을 지나게 되었다. 홀린 듯 다가간 나는 옆모습을 흘끗 곁눈질해 보았다. 괜히 했다. 하지 말걸. 그냥 나는 아주 준수하다고 정신승리하면서 살아갈걸. 5년 전 우리 강아지 스쿠치 살아생전에는 개 산책을 시키느라 하루 못해도 두 번 30분씩 언덕과 골목을 누벼서 종아리와 엉덩이 하나 단단한 것에 큰 자부심이 있었다. 그 반려견이 죽고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5년을 산 결과는 너무나도 정직했다. 통유리창 건물이 따로 눈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내 옆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답답하게 붙은 턱살과 목살, 두 살이 닿으면서 만들어진 목주름, 살찐 몸과 반비례하는 납작한 가슴, 가슴보다 자기주장이 확실한 배, 빈약한 근육을 넉넉하게 감싸고 있는 힘 없이 흐들거리는 지방들. 나는 깨달았다.


먹고살려고 아등바등 움직인 건 운동이 안되는구나.
노동은 그냥 노동일뿐이구나.

몸의 기능만을 충족하기 위해 뼈 위에 얄팍하게 남겨진 근육들과 그 위를 두텁게 덥고 있는 불필요한 지방들. 눈치 없는 통유리창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내 몸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항상 현실은 기대치를 밑돌기 마련이고 대가는 기대치를 웃돌기 마련이다. 나름대로 귀엽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것이 남편의 애정에서 나온 얄팍한 자신감이었구나, 새삼 남편에게 고마워졌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그 자기애도 아니고 잘빠진 몸매도 아니다.


뛰어서 몸에 산소를 공급하자.

혈관 속의 지방을 태워서 청소하고 끈적한 피를 깨끗하게 만들어보자.

보기 좀 흉하면 어때?

난 이제 시작인데.


목표를 '이쁜 나'가 아닌 '건강한 나'로 잡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고 달리는데 집중이 잘됐다. 달리면서 내 옆모습을 흘끗거려 봐야 아까 본 그 아줌마가 날 바라볼 뿐이다. 그 아줌마가 갑자기 아가씨가 될 것도 아닌데 정신을 딴 데 팔면 달리기는 망한다. 내 발끗, 발바닥,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피에 집중했다. 다시 한번 난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힘이 솟았다.


p.s 달리기 시작하신 분들 댓글공유해주세용!

집 뒤 Coit Tower를 찍고 함박웃음
마지막 운동을 끝내고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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