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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프란 곽여사 Aug 12. 2023

6. 40대, 고혈압보다 백배는 위험한 이것.

달리다 보면 좋은 곳으로 가 있을 테니까. 나처럼.

Morro Bay의 한가한 여편네

지난주 LA에 사는 친구와 의논해서 샌프란시스코와 LA 딱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다. 얼추 지도를 보니 Morro Bay, CA라는 지점이 공평하게 3시간 45분씩 운전하면 도착하는 지점이었다. 그 친구와 바닷가를 거닐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해산물을 먹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일정이 빡빡해서 1박을 하고 금방 돌아갔고 나는 혼자서 1박을 더 했다. 혼자서 느긋하게 전자책을 3권이나 읽다 잤다.  

다음 날 해변가를 조깅하고 아주 예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왔다. 해변가에서 유명한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니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가한 바닷가 풍경… 이렇게 여유로운 삶, 감사합니다


'살아있길 잘했구나.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그 생각을 하면서도 너무 벅찬 기분이 들어 그저 내 생각을 듣고 있을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렇게 여행올 수 있도록 건강한 몸이 감사하고,

여행 와서 눈치 보지 않고 돈 쓸 수 있음에 감사하고,

오늘 날이 좋아 셀카가 기가 막히게 잘 나오는 게 감사하고,

지갑에 현금이 있어서 감사하고,

빌린 차가 문제없이 굴러가서 감사하고

내가 그 순간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것에 감사했다.




살면서 '죽고 싶다'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물론 없을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본 사람이 훨씬 많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부족함이 없어 보이고 해맑아 보이는 사람조차도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진흙 같은 시간을 허우적거리며 건너왔을 수도 있고, 끝없는 절망의 사막을 건너왔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몇 년을 지옥 같은 시간을 건너왔다.


지금의 나를 누가 본다면 매일 운동이나 하면서 커피나 마시는 한가한 여편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나는 고맙다. 내 얼굴이 찌든 아줌마에서 '한가한 여편네'로 승진을 했다는 사실이니까. 실상은 지난 5년을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삶'이라는 이름의 사막을 어깨 위에 모든 것을 올리고 걸어왔다. 그렇게 삶이 고단하면 그림자처럼 우울증이 따른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너무 이쁜 거리. 알록달록




힙겹게 달리던 모습. 옷조차도 우울하네… 달리기 1주차

우울증은 무색, 무취, 무맛이다. 형체도 없고 색도 없다. 중독이 되는 줄도 모르지만 서서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삶을 파괴한다. Morro Bay에서 반짝이는 햇살이 하늘거리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난 처음 샌프란시스코의 바닷가를 뛴 날을 기억했다. 저린 다리를 질질 끌듯이 움직여 도착한 바닷가 광장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경기가 되살아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는 사람, 바닷가를 배경으로 이젤을 놓고 스케치를 하는 사람, 둘이 부둥켜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들 바닷가는 살아있는 에너지가 넘실대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바닷가를 따라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이렇게 사람들은 달리고 있는데 나는 여태 뭐 했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가 지난 5년간 한 일이라곤 통장을 들여다보며 그저 하루하루 낼 거 내면서 산 삶, 그뿐이다. 한 번 어긋난 삶의 바퀴는 휠얼라이먼트가 안 맞는 차처럼 자꾸 나를 비뚠 곳으로 인도한다. 그것을 다잡으려면 팔이 아프도록 단단히 잡아야 하는데 절망에서 오래 구르다 보면 그럴 힘이 없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회색빛의 무색, 무취, 무형의 우울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우울증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면 개미지옥이 따로 없다. 거기서 나오려면 정말 내 삶을 뒤집어엎을 만큼의 큰 충격이 있어야 한다. 크게 아프거나, 큰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어떤 사건으로 크게 깨닫거나 그중 하나다. 난 혈압이 미친 듯이 올라 거기서 충격을 받아 운동을 시작해서 우울증에서 벗어났다. 벗어나고 보니 우울증인지 알았지 그때는 그냥 삶이 고단하네, 그러고 말았다.


바닷가를 달려보니 바닷물이 쏴아 밀려와서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에 모인 것들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쏴아 가져간다. 다시 한번 바닷물이 쏴아 밀려온다. 한 번씩 바닷물이 밀려올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 서서 바닷가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났지만 슬프지 않았고 오히려 기쁜 마음이 벅차올랐다.

좋은 시작이다.

달리기를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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