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의 마리오 할아버지.

처자, 4-7-8 기억해!

by 샌프란 곽여사
마리오 할아버지와의 대화

급하다.


아침부터 마음이 급하다. 목금토 미친 듯이 바쁜 일을 마치고 일요일 하루를 쉬고 나서는 월화수목금토 살인적인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다. 내일은 또 다른 콘퍼런스가 시작되어 아침 11시부터 종일 일해야 한다. 그전에 UPS 패키지도 픽업해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야 하고 지지난주부터 먹고 싶던 짜장면과 탕수육도 먹어야 한다.


동선이 동서남북 겹치는 데가 없으니 난 시간 계산을 하며 마음이 급해진다. 아무튼 급하다. 느긋하게 마셔야 할 커피도 빨리 마시고 나가야 한다는 마음에 맛도 음미할 수 없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생각하자.


지금 픽업 못하면 시간이 없어 다시 돌려보낼지도 모르는 아마존 패키지 먼저 찾으러 간다. 막상 밖에 나와보니 날이 화창해서 한 숨 돌리게 된다. 마음은 조금 느긋해졌어도 ‘다리를 쉬어줘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이 들어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패키지를 찾고 버스를 탈 생각으로 정류장까지 걷는데 공원을 가로질러갔다.


케이블카를 타려고 기다리는 긴 줄

사람들이 길게 줄 선 케이블카 종점 주변으로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걸어오지 않았다면 놓쳤을 한 편의 시 같은 풍경이었다. 아주 드물게도 야자수 나무의 꽃을 보게 되었는데 그 꽃이 너무 향기로워 벌들이 난리도 아니다. 꽃 사진을 찍는데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내가 뭐 하나 쳐다본다. 난 사람보다 꽃이 더 좋거든요?

처음보는 야자나무 꽃!

잠깐 야자나무에 정신이 팔렸지만 또 슬슬 조급함이 밀려온다.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간이 좁혀지려고 한다. 빨리 가려면 버스를 타야겠다.


빨리 먹고

빨리 집에 와서

빨리 빨래를 마치고

빨리 쉬자.


마음이 잠시도 쉬지를 못한다. 버스 정류장에 갔는데 웬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신다. 눈이 마주쳐서 웃었더니 어느 버스를 기다리냐 물으신다. 47번이요.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고 금방 안 온다고 알려주신다. 어디 가냐고 물으신다.


“제가 오늘 하루 쉬는 날인데 월화수목금토 일을 엄청 하거든요. 그래서 버스 타고 재팬타운 가서 맛있는 거 좀 먹고 장도 좀 보고 얼른 집에 가서 쉬려고요. 제가 다리를 좀 쉬어줘야 해서요.”


다다다다 말씀을 드리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무릎관절 교체 수술을 해서 버스 타고 다녀야 한다며 지팡이를 보여주신다.


아이고.


나는 무릎 연골이 닳아서 없어진 노년의 여성도 아닌데 무슨 유난을 이리 떨었지? 후회가 된다. 기껏해야 3일 일하고 하루 푹 쉬는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 이렇게 좋은 날 씩씩하게 걷는 기분이 얼마나 축복인지도 모르고 그저 급한 마음에 얼마나 많은걸 놓쳤을까.


이 좋은 날을 놓치고 싶지 않다.

오늘이 내 인생의 제일 젊은 날인데.


그 할아버지와 무릎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내 고혈압 이야기, 수면장애 이야기, 커피 이야기 종알 종알 떠들었다. 할아버지가 4-7-8 호흡 기술을 알려주셨다. 혀끝을 윗니 안쪽에 붙인 채 4초 들이쉰다. 그 상태로 숨을 폐 속 깊이 머금고 7초를 버틴다. 폐가 터지려고 할 때쯤 천천히 숨을 8초를 내쉰다. 그러면 꿀잠을 잔다고 하신다.


“내가 여태 배운 것 중 최고의 기술이지. 꿀잠을 자거든! 천사처럼.”


내가 기다리던 버스는 3대가 지나쳐갔지만 나는 밝아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한참을 더 떠들었다. 혹시 셀카 좀 같이 찍어도 되냐고 여쭈니 그럼 그럼! 하며 마스크도 내리신다. 사진을 문자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 성함을 Mario라고 한다. 저는 지영이요. Jiyoung.

마리오 할아버지와 인사를 하고는 난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급하게만 걷던 걸음도 씩씩하고 느긋해졌다. 1시간 7분을 걸어 짜장면도 먹고 장도 봤다.


명심, 또 명심.

오늘은 내 인생의 제일 젊은 날이고 오늘은 허투루 보내면 안 되는 소중한 내 인생의 하루라는 거.

마음을 느긋하게 하니 이쁜 꽃이 눈에 들어온다. 티트리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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