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혜선은 무척 저돌적인 성격이다. 그 남자 옆으로 지나가는 척하며 무릎 위로 넘어지라는 둥, 엉덩이가 잘 보이게 뒤로 걸어가라는 둥, 술을 먹여서 자빠뜨리라는 둥 난리였다. 목청이 떨어지게 신나서 떠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가 아파온다. 그런데 실은 혜선과 지영, 둘 다 연애 경험이 전무했다. 순진한 햇병아리 아가씨들인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을 목표로 죽자 사자 공부해서 합격한 뒤 갑자기 허탈해진 지영은 부모님 몰래 1년 휴학을 신청했다. 지영은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게 꿈이어서 지금도 틈틈이 저녁마다 글을 썼다. 글쟁이 따위 밥벌이도 못한다며 질색하는 부모님은 지영의 꿈을 무시했다. 게다가 몇 달 전 휴학한 게 들통나 대노한 부모님이 생활비 원조를 끊어 저녁마다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을 한다. 그래도 괜찮았다. 잠시나마 원하는 대로 살아볼 수 있다면.
“야 너 그렇게 첫눈에 반하는 게 쉬운 줄 알아? 그냥 들이대! 원래 일은 말도 안 되게 시작되는 거야.”
“아니, 뭘 어떻게 들이대는지 알아야 뭘 하지…”
지영은 우물쭈물 대며 남자의 하얀 손을 흘끔 쳐다봤다. 저 손을 잡으면 어떤 느낌일까? 의외로 손이 크네. 내 손보다 많이 크려나. 지영의 눈길은 손이 놓인 남자의 허벅지에 닿았다. 면바지 위로 팽팽하게 솟은 남자의 다리는 단단해 보인다.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이 뜨거워진다. 시끄러운 혜선의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눈길을 조금씩 찬찬히 올린다. 남자가 약간 자세를 바꾸는지 가슴을 쭉 핀다. 맨투맨 셔츠 위로 살짝 속은 남자의 가슴팍을 보고 입으로 ‘오’ 라며 소리 없이 감탄한다.
“가서 그냥 쿨하게 인사해. 그리고 술 한 잔 하자고 하면서 자빠뜨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지도 경험이 없으면서 말은 잘하지.
수험생 시절의 스트레스를 19금 로맨스 소설로 풀어낸 혜선은 연애 경험은 없지만 머릿속으로는 색녀 수준이었다. 가끔 너무 거침없이 말해 듣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일단 술을 마시고 취한 척하면서 그 남자한테 기대. 우리 이제 21살이야! 그 남자가 너를 안 만지고 배겨? 속옷을 안 입던가 얇은 걸로 입고 그 남자 가슴팍에 뭉근히 비비면서…”
지영은 너무 나가는 진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남자가 중국인이라 다행이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데 혹시라도 들릴까 봐 무섭다. 이 남자 가슴팍에 내 가슴을… 순식간에 지영의 귀까지 새빨개졌다. 이놈의 계집애 진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쨌든 담달까지 술도 못 마시는데.
지영은 혜선의 코치를 들으며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저 붉은 입술, 어떤 느낌일까? 침을 꼴깍 삼킨다. 미쳤나 봐! 그래도… 힘 있게 뻗은 코, 그리고 눈. 가늘게 미소 짓고 나를 바라보는 눈?
덜컥.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지영은 황급히 눈을 아래로 내렸다. 심장이 달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린다. 설마, 지금 나를 보고 있었어? 언제부터?
조심스레 다시 올려본 그때 남자는 이전처럼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래, 우연이겠지. 휴… 너무 놀라서 다리가 달달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몇 살일까?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은 20대 중반 같은 젊음도 있지만 마디가 불거진 손과 다부진 턱선은 좀 더 성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낮고 조용한 목소리. 성숙한 남자의 목소리다.
휴, 심장에 안 좋아. 일단 가자. 어디선가 또 보겠지.
“나 그냥 갈래. 휴… 역시 이런 건 너무 힘들어.”
“쯧쯧쯧, 네가 그러니까 여태 처녀 딱지 못 뗀 거야. 말도 못 붙여 맨날.”
“왠지 너무 창피한 걸 어떡해… 그리고 내 처녀 딱지 걱정 말고 네 거나 떼는 게 어때? 참나…”
“난 최상품으로 고르는 중이야. 튼튼하고 힘 좋은 남자로. 21년을 참아온 내 욕구는 어설프게 끄면 탈 난다고.”
“혜선아 나 진짜 누가 들을까 봐 무서워 어휴. 이따 봐!”
지영은 한참 동안의 망설임과는 상반되는 깔끔한 태도로 끙차-하며 일어섰다. 남자도 일어서려는지 휴대폰을 집어넣고 손을 스트레칭하는 중이었다. 내 이상형 안녕.
끙끙대며 그 앞을 지나는 그 순간, 남자가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호기심 어린 미소를 띠고 남자가 말한다.
“내 손, 그렇게 맘에 든다면서요.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