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다시 만났어!
혜선은 여태 크롭탑 & 속옷 차림으로 춤을 추는 중이다. 손으로 빵빵빵 총을 쏘는 흉내도 내고 그 총을 허리에 차고 엉덩이를 훅훅훅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 지영은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혜선은 휴대폰에 연결된 큰 스크린으로 수없이 올라오는 댓글들을 확인하며 손 키스를 날리기도 하고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 윙크를 날리면 댓글들이 거의 회전문 속도로 올라온다.
‘저런 오글거리는 짓을 잘도 하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야지. 그렇게 수긍하고는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지영이 사는 North Beach 는 이른 초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춥지도 않은지 배를 훤히 드러낸 짧은 크롭톱 아가씨들이 신호등 앞에 옹기종기 서서 어디로 갈지 의논 중이다. 신호등 앞 은행 건물 모퉁이에는 낡은 회색 후트 재킷과 그보다 더 낡은 때탄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노래를 할 준비를 한다. 띠리링- 한 번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훑으며 소리를 조금씩 조율한다. 기타케이스에는 Tips 라고 적힌 손때 묻은 박스 종이가 놓여있다. 지영은 그 모퉁이를 지나쳐 대로를 따라 곧게 앞만 보고 걸었다. 흥청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괜한 고생을 하는 걸까’ 후회가 들까 봐 앞만 보고 걸었다. 내가 원하는 건 저런 흥청대는 삶이 아니니까.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숨이 가빠올 정도로 걸었을 때 가게의 붉은 간판이 보인다. 지영은 숨을 다듬고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시원한 이목구비의 페르시안 미녀, 노라 Nora가 하이, 지영! 하며 손을 흔든다. 4:30 pm.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한산하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지영은 조금 더 단단해 보인다.
바 쪽에서는 또 다른 지영이 프랭클린과 농담을 한다. 그 지영은 편의 상 모두 제이라고 불렀다. 총매니져 및 어시스턴트 매니저들이 급할 때 제이로 부르던 게 굳어졌단다. 제이는 유부녀 특유의 유들유들한 태도로 직원들과 사이가 좋았다.
“프랭클린, 유어 사이즈?”
제이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바 픽업 테이블에 놓인 오이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지영은 ‘이거 성희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조마조마했다. 프랭클린은 엘살바도르 출신의 근육질 남자로 영어가 썩 완벽하지 않아 단조로운 단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근데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사이즈를… 지영은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려는 것을 애써 진정시켰다.
프랭클린은 그늘에서 수월하게 자란 뿌듯한 호박 크기의 오이를 손으로 덥석 잡으며 어깨 근육에 단단히 힘을 준다.
“Mama, No More No Less.”
그는 자부심과 뿌듯함이 공존하는 잘 나가는 유튜버 자식을 둔 부모님 같은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는 눈으로 자신의 그곳을 흘끗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웃는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이만하다, 그 뜻이다. 지영은 재빨리 눈으로 오이를 흘끗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저런 크기… 말도 안 돼. 그보다 저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Wew~Good for you. 어머~좋겠네.”
“Good for you too. 당신에게도 좋을 거야.”
“You wish! 꿈도 야무져!”
지영은 프랭클린과 제이의 낯 뜨거운 농담을 들으며 커다란 오이를 한 번 더 힐끗 봤다. 휴, 이제 오이 샐러드 한동안 못 먹겠어. 얼굴을 살짝 붉힌 지영을 보며 제이는 귓속말을 했다.
“위가 가벼우면 아래라도 무거워야지 않겠어?”
프랭클린은 터질듯한 셔츠에 꽉 끼는 바텐더 조끼를 입고 좌우로 휘적대며 걷는다. 운동을 많이 하는 모양인지 큼직한 근육이 불끈거린다. 그러나 그는 사실 낙하산 바텐더로 가게가 바텐더를 못 구해 곤란한 찰나 ‘훈련시켜 써먹자’ 하는 심정으로 고용한 바텐더였다. 마가리타 하나도 못 만드는 바텐더라니, 확실히 낙하산이다. 지영은 자신도 일 경험 없이 고용된 사실상 그와 동급의 낙하산이므로 아무 말도 안 하고 미소만 지었다.
“지영! 네 섹션에 새 테이블 방금 앉았어. 알려주려고.”
어시스턴트 매니저 마르셀라가 다가와서 말하고 총총총 사라진다. 어디 어디…
악. 지난 2주간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끊임없이 남자 친구 있냐는 둥, 퇴근 후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냐는 둥, 몇 살이냐는 둥 쓸데없는 질문을 퍼부으며 계산서에 전화번호를 남기는 남자. 제이콥이다. 저런 걸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려나. 두 손을 마주 잡고 비비는 그의 상기된 표정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처음엔 왠지 부끄럽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아무 말 없이 웃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가 바에 앉아서 술을 마실 때 그녀의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그를 찾아와 한참을 떠들다 울며 뛰쳐나가는 걸 본 이후, 지영은 완고한 입장을 취했다. 제이콥은 큰 키에 매끈한 피부를 하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아주 댄디한 남자였다. 그는 여성에게 매너도 좋고 달콤했지만 누구에게나 퍼주는 경품 같은 달콤함은 사절이다. 바에서 자신의 섹션으로 가는 발걸음을 뚝 멈춘 지영은 호스트 스탠드로 발길을 꺾었다.
“노라!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
“지영! 정말 미안! 하지만 저 남자가 계속 널 찾을 테니까 어쩔 수 없어.”
난처한 표정의 노라는 두 손을 모아 붙이며 설명했다. 어쩔 수 없지. 지영은 제이콥을 노려보며 그 테이블로 향했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크게 밝아지는 그의 표정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제이콥의 맞은편에는 깔끔한 흰 셔츠를 입은 남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상인이기를.
손님이 한 명 더 있으니 제대로 멘트를 해야지. 제이콥 혼자라면 ‘또 오셨네요?’ 라고 하겠지만. 집에서 몇 번이고 연습한 멘트를 시작한다.
“Hi! Bem Vindo Fogo De Chao. My name is Jiyoung. I’m gonna be your… 아!”
그 남자다
“이름이 지영이라…예쁜 이름이네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