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하게 된 통화
꽃보다 그녀-9 아저씨일 줄이야
지영은 침대에 누워 전화번호가 쓰인 쪽지를 보고 또 봤다. 38살이라니. 기껏해야 26 많아야 30이라고 봤는데… 딱히 나이에 대한 제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띠동갑도 아닌 조금 과장해서 아빠뻘 나이다. 그 하얀 손은 곱고 섹시했는데… 대체 나보고 어쩌라구 이렇게 번호를 주고 갔지? 내 새가슴으로 절대 먼저 연락 못하는데. 차라리 내 번호를 물어보지. 이 아저씨가 들이대면 내가 싫은 척할 수는 있는데. 그 쪽지를 노려보며 지영은 발가락을 꼬물댔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지영은 스스로 어떤 타입이 좋은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독립하고 스스로 생활을 하다 보니 남자 친구가 생긴다면 조금 기댈 수 있는 남자, 연상인 남자가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는 했다. 근데 연상도 적당히 연상이 자연스럽지 나보다 18살 연상이라니.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야! 쪙!”
“으악!!!”
“모야 너… 불러도 대답도 없고. 그건 무슨 종인데 그렇게 노려봐?”
“아, 깜짝이야… 아무것도 아냐.”
지영은 황급하게 종이를 손에 쥐었다. 급한 성격의 혜선이 본다면 지금 당장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정백현? 모야, 남자 이름인데? 나 그 번호 지금 외웠거든? 빨리 자백하시지..?”
지영은 혜선에게 솔직히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나 일하는데 오늘 친구랑 손님으로 왔었어. 진짜 놀랐거든. 내 이름이랑 생일이랑 물어봤어. 근데 가면서 이 쪽지를 주고 갔는데 어쩌지?”
“진짜? 대박. 인연인가 봐. 잘 생겼어? 키 커?”
“음… 얼굴이 엄청 어려 보여서 20대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곧 38살 된데.”
“뭐야, 아저씨네?… 아저씨들이 경험도 풍부하고 기술도 좋다는데. 어머~ 우리 지영 씨 나보다 처녀 딱지 빨리 떼겠네~!”
“꺅! 징그러워! 뭐야 그냥 전화번호만 받았는데…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이렇게 하구 간 건지… 몰라 난.”
“근데 뭐야 너무 아저씨 아냐..? 몸 좋아?”
“응? 응… 이번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왔는데 되게 멋있긴 했어. 그리고 지난번 앉아있어서 몰랐는데 날 한참 내려봐.”
혜선은 이미 영화 한 편을 쓰기 시작했다. 몸 좋은 남자와 살이 부딪히고 문질러지는 마르고 닳게 신음하는 그런 영화. 지영은 얼굴이 너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솔직한 호기심은 있었기에 백현의 전화번호가 쓰인 종이를 쥐고 한참을 혜선의 시나리오를 들었다.
남자의 몸은 여자의 몸과 엄청 다르다는데…단단하다는데 대체 어떻게 단단하다는 걸까. 책상처럼? 나무처럼? 생각할수록 너무 부끄러워졌다. 이게 다 혜선이 때문이야.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Hello.”
응? 이게 뭐지? 곰곰이 수줍은 망상을 하던 지영의 귀에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혜선이 언제 걸었는지 지영의 전화기를 귀에 대주며 입모양으로 ‘정백현’이라고 한다. 지영은 인기척을 느낀 사슴처럼 바짝 굳은 채로 머리가 하얘졌다.
“Hello…?”
한 번 더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발을 공동 굴리다가 지영은 작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 그, 그게…”
“… 지영 씨? 의외로 결단력이 있네요. 큭..”
“그, 그게 아니라 제 룸메이트가 저도 모르게 전화를 걸어버려서…”
지영의 얼굴은 삶은 문어처럼 빨갛게 변해 김이 모락모락 날 지경이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해보려 했지만 그게 지영을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연락이 안 올까 봐 걱정했는데. 그 룸메이트에게 감사해야겠어요. 공원에서 통화한 혜선이라는 친구?”
미쳤어 미쳤어. 지영은 그날의 통화내용이 떠올라 지금 멘붕이 오기 직전이었다. 너무 당황하고 부끄러워 머릿속이 텅 비어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디까지 들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지영은 굳이 그런 걸 묻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