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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Apr 04. 2018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여행 기록

1.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다.


몸이 많이 아팠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들을 두고 혼자 한국에 왔다. 대학 병원에 입원해서 온갖 검사를 다 받았다. 결과는 '이상 없음'이다. 분명 나는 아팠고, 진단받고 치료받기 위해 온 것인데.......


갑자기 한국에 온 이유도 목적도 없어졌다.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그곳을 꼭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가 보기로 했다. 15년 만이다. 마음먹은 것을 바로 해보는 것. 혼자 비행기를 탔을 뿐인데 이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첩을 꺼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보려고.


펜 끝이 종이에 닿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었던 일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아이들이 좀 크면......'이라며 내 마음을 지웠다. 그렇게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15년이 흘렀다. 돌아보니 바쁘게 아이들만 돌보았을 뿐 정성을 다한 만큼 곱게 자라지도, 세심하게 키운 만큼 완벽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부질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분유 한 번 먹지 않고 모유만으로 무럭무럭 자랐고, 내가 만든 이유식으로 건강해졌고, 내 등에 업혀 잠이 들었고, 내 손을 잡고 걸음마를 떼었다. 밤새 보살펴 준 내 손으로 병이 나았고, 내가 만든 글자 카드로 한글을 깨쳤고,  내 손을 잡고 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은 항상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나는 적절히 그러나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허락했다.

아이들은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나는 적절히 그러나 가능한 많을 것을 들어주었다.


이 정도면 전지전능하지 않았는가? 아이들을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하거나 바랄 필요가 있을까? 이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적기만 하면 된다. 다만 아직 한글을 떼지 못했고, 학교를 들어가지 못한 막내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제주도 이륙 안내방송이 나온다. 안전벨트를 조여 매고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한다.


문득 작년 제주에 정착했다는 그녀가 생각났다. 그래, 그녀라도 만나보자. 뭔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 같은 그녀를......


2. 제주 공항에 내려 전화를 한다.


14년 전, 첫째가 7개월 무렵이었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인근 베이비 짐보리에서 만났다. 비슷한 나이에 첫 아이를 둔 그녀는 참 고왔다. 출산 후 부기가 빠지지 않은 나는 헐렁한 바지에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 아기를 안고, 기저귀 가방을 멘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밀고 들어갔다.


참 예쁜 그녀를 보았다.  완벽한 몸매에 맵씨 있는 옷차림이다. 아기 키우는 엄마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기는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아주머니가 안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재력가들이 사는 대형 평수 아파트에 상주 아주머니를 두고 살고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작은 아파트에 전세 살고 있던 나와 그녀는 참 다른 모습이었다.  


아이의 프로그램이 끝나면 유모차를 끌고 서로의 집에도 가고, 공원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우리 서로에겐 바쁜 남편이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알고 지냈다. 내가 다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몇 해 전 '알 수도 있는 친구'라며 페이스북이 그녀를 소개했다. '아이들이 많이 컸구나. 어디에 살고 있구나' 수준에서 서로를 이해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다.

또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얼마 전 제주에 정착했다는 그녀의 소식이 들렸다.   


3.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바닷가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녀의 타고난 친화력이 우리의 어색함을 어제도 만난 듯 편하게 했다. 그녀는 크게 웃었고 지나치게 밝아 보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그녀가 갑자기 말한다.


 "나 이혼했어!"


하지만 여전히 들뜬 목소리에 밝은 얼굴이었다.


힘든 시간을 견디다 드디어 찾은 자유라고 했다. 제주에서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여름에는 캐나다로 떠난다고 했다. 새로운 계획들이 많았다. 주변 친구들이 모두 자신을 부러워한다고 했다.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힘겨웠던 엄마의 자리, 아내 자리를 떠나니 비로소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이다.


같은 방식의 '떠남'은 아니지만 홀로 잠시 떠나온 나는 어떤 일이 하고 싶을까......


나에게 새로운 계획이 생겼을 때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야겠다.  밝게 웃으며 하고 싶은 일 생겼다고 말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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