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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Aug 20. 2020

뭐 알고리즘이 어쨌다고?

영국 교육


영국은 요즘 '알고리즘' 때문에 시끄럽다. 지난주 발표된 A-Level 시험 결과 때문이다. A-Level은 영국의 13학년 학생들이 치르는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이자 대학 입학시험이다. 매해 5월 A-Level 시험이 있지만 올해는 신종 코로나 팬데믹으로 취소되었다. 1951년 이 시험 제도 도입 이후 7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시험이 취소되자 수험생, 교사, 학부모 모두 일대 혼란이 있었다. 이런저런 논의 끝에 학생의 소속 학교 교사가 예상 점수(Predicted Grade)를 주고 A-Level 시험 주관사 (Exam Boarder)에 보내면 시험 감독 기관인 Ofqual이 이를 바탕으로 여러 요소를 종합해 최종 점수를 발표하기로 했다.

교사 재량으로 주어지는 예상 점수는 올 1월 치러진 개별 학생의 A-Level 모의고사 점수와 그 외 학업평가를 바탕으로 하기로 했는데 학생과 학부모들은 '교사의 평가를 신뢰할 수 없다.’, ‘교사의 주관적 판단에 우리 아이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반발했다. 이때 Ofqual은 '알고리즘'을 들고 나왔다.

지난 3년간 해당 학교가 보여준 A-Level 최종 결과 지표, 소속 학생의 과거 학업 평가 데이터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알고리즘'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최종 점수를 도출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잘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알고리즘, 뭐 정말 그런 좋은 게 있나 보다'하면서 일단 최종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지난 몇 달간 '과학적 알고리즘'은 열심히 학생들의 최종 점수를 계산해 냈고 드디어 지난주 결과 발표가 있었다. 영국 언론 매체들은 카메라를 들고 발표 현장으로 달려갔고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A-Level 결과 발표일은 단순히 점수 공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학입시 합격/불합격이 최종 결정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대혼란'이었다. 전체 학생의 40%가 예상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영국 대입제도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인데 대학은 여러 가지 지원요건과 함께 A-Level 최저 점수를 요구한다. 학생은 예상 점수를 바탕으로 대학에 선지원하고 지원자의 요건이 충족되면 대학은 일단 조건부 합격을 준다. 그리고 A-Level 시험 결과가 발표되면 최저점수 충족 확인 후 최종 합격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번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결과로 약 28만 명의 학생들이 최종 불합격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서 이번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들고일어났다.

< A-Level 결과에 반대하는 피켓시위>

결과 불복의 근거도 역시 통계와 데이터였다. 예상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 상당수가 저소득층 주거지 공립학교 출신이고 예외적으로 예상 점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일부 학생들은 대부분 부유층 사립학교 출신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특정지역 특정학교의 경우 교사가 부여한 예상 점수가 평년 성적에 비해 고평가 되었던 것 같다. 그 부분을 알고리즘이 평균에 맞도록 조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예상보다 낮은 점수를 받게 된 것이다. 해당 학생들은 ‘JUDGE POTENTIAL NOT POSTCODE(가능성으로 평가하라, 우편번호로 평가하지 말라)’는 피켓을 들고 나왔다.


저소득층 지지기반의 노동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다. ‘이번 결과는 명백한 차별금지법 위반이며 이로 인해 계층 갈등이 심화되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학생들의 미래가 망가졌다’면서 정부를 비판하고 교육부 장관 사퇴까지 요구했다.

불이익을 당한 학생과 학부모는 이번에는 'TRUST TEACHERS NOT TORIES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교사를 신뢰한다)', 'STUDENT NOT STATISTICS (우리는 학생이다. 통계가 아니다)'며 피켓 시위에 나섰다.

< A-Level 결과에 반대하는 피켓시위>


결국 교육부 장관은 이번 사태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U-Turn'을 선언했다. 알고리즘에 점수 대신 선생님들이 제출한 예상 점수를 A-LEVEL 최종 결과로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알고리즘의 '의문의 1패'다. 'U-Turn’ 선언 이후에도 여전히 ‘도대체 알고리즘이 무엇이냐', '청문회를 열어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자'며 Ofqaul과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3월에도 초지일관 '데이터와 통계 기반의 알고리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과학적 근거에 의한 대응방안과 방역 방침을 마련하겠다'라고 했었다. 하지만 여론의 반응이 싸늘해지면 바로 겸손하게(?) 여론에 귀 기울이는 스텐스를 취한다. 아는 바는 없지만 통계와 알고리즘이 전체적 맥락에서 큰 흐름을 보여주고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효율적일 수는 있겠지만 이번처럼 개별 상황이나 개인의 특수성은 배제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니 정부가 이런 부분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정치적 부담을 안고 싶지 않기도 했겠지만.

영국은 전반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이해 당사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면 불도저식으로 강하게 밀고 나가지 않는다. '그래 그래. 얘기 좀 들어보자. 불만이 뭐야?', '그렇구나. 나도 이해하지. 그럼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살살 달래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다. 정부 정책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은 '정부가 무능하네. 생각이 없네. 하는 일이 없네' 비판하지만 이런 우유부단한 정부 덕에(?) 이해 당사자들과 큰 충돌은 피하고 사회적으로도 지나친 편 가르기가 없다. 물론 극단주의자들도 있겠지만  ‘O빠’, ‘OO부대’처럼 부정적 집단 이미지를 씌워 서로 심하게 공격하는 건 아직 보지 못했다.


영국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정부 정책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이해 당사자의 유불리에 따라 좋은 정책, 나쁜 정책은 있지만 그 자체가 선과 악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안에 따라 찬성과 반대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 목숨 걸 필요 있겠냐는 것이다. 너무 개인주의 아닌가 싶다가도 목숨 걸고 살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나저나 알고리즘이라는 것이 사회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사회갈등을 해결하는 과학적 툴로 사용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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