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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Sep 19. 2020

시간을 대하는 자세

영국 교육





영국의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코로나 이후 6개월 만에 그야말로 아침 일상이 돌아왔다. 세 아이가 연령대별로 각각 초중고에 속해있다 보니 아침 풍경도 제각각이다. 물론 연령 차이도 있겠지만 태생적으로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이마다 달랐다.

큰 아이는 어려서부터 시간에 대한 약간의 강박관념이 있었다. 말문이 트일 무렵부터 아침에 눈 뜨면 '엄마 오늘은 뭐할까? 스케줄이 뭐야?' 물었고 삼시 세 끼를 정해진 시간에 요구했다. 자신만의 취침 시간도 정해져 있었는데 집에서야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지만 손님 초대로 가족 모임에 가게 되면 난감했다.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다가도 자기는 몇 시에 자야 하니까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우겼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어른들이 돌아가며 설득을 해 보았지만 결국 큰 아이의 원칙에 밀렸고 우리는 미안해하면서 자리를 떠야 했다.

만 5세가 되어 큰 아이가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새벽부터 일어나 혼자 옷까지 챙겨 입고 나를 깨웠다. '엄마 밥 주세요. 저 이러다 학교 늦겠어요!' 갓 태어난 둘째 밤중 수유 때문에 밤새 비몽사몽의 경계를 넘나들던 나에게 큰 아이의 목소리는 끄고 싶은 알람시계였다. 그런 일도 없었지만 학교에 늦으면 영락없이 내 탓이 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학교에 너무 일찍 도착해 경비 아저씨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다. 주말에도 시간을 대하는 큰 아이의 자세는 한결같아 나는 아침밥을 차려 주기 위해 어김없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했다. 뭐든지 주도적으로 해주는 아이가 고맙기도 했지만 세 아이 걸쳐 총 7년간 모유수유를 했던 나는 밤잠도 새벽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이 주도형 육아(Child Driven Parenting?)'의 폐해였다.

큰 아이에게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이런 시간에 대한 강박은 나를 닮았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학교 늦을까 새벽부터 일어나 밥도 먹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신발장 앞을 서성였다는 거다. 아무튼 이런 삶의 피로감을 알기에 큰 아이에게 항상 얘기했다.  '사람이 시간에 메여 살면 안 돼. 여유를 가져야 해. 서두를 필요 없어. 늦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아무튼 나이가 들면서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큰 아이의 시간의 대한 지론은 '자신은 시간에 메여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다. 통제(?)를 위해서는 항상 한 발 앞서 나가야 한다.’ 덧붙여 ‘세상에 시간이 없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것은 게으름에 대한 핑계일 뿐이다. 시간은 만들면 생기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동생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올봄부터 코로나가 사춘기를 만나 ‘인생 지각변동'이라는 합작품을 만들었다. 큰 아이는 잠시 딴 세상 사람이 된 듯했다. 하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니 역시나다. 등교 첫날 동도 트지 않았는데 큰아이로 추정되는 새벽 부산함이 들린다. 이제 일어나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이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잠긴 목소리로 ‘밥은?' 소리치며 일어나려 했으나 낮고 작은 목소리가 '먹었어요'하며 대문을 닫는다. 이제 수험생이 되었으니 적어도 아침식사는 챙겨주자’했던 나는 미안함도 잠시 다시 잠이 들었다.





둘째는 태어나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감지되었는데 도통 시간 경계가 없었다. 시간에 관계없이 원하는 대로 놀고 자고 먹었다. 그런데도 주어진 시간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더 자고 더 놀지 못해 항상 불만이었다. 덕분에 나도 좀 느슨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경계 구분은 해 주어야 했다.

영국계 학교는 만 5세 입학이니 그 나이가 되면 적어도 등교 시간은 지켜야 했다. 둘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아주 힘들어했는데 등교 첫날 자동차 뒷자리에 누워 멍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엄마... 신은 시간 속에 살지 않는데 왜 인간은 시간 속에 살아야 해?' '아... 이 철학적 질문은 무엇인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아 막 던졌다.

‘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 시간 개념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살아야 해. 그리고 시간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야. 그래야만 우리는 서로 어울려 살 수 있어. 이건 그냥 서로를 위한 약속이야. 신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겠지만 어쩔 수 없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역시나 제대로 모르면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너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만큼 학교에 있어야 해!!'였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두 아이를 향해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형과 같은 학교에 다녔던 둘째는 아침마다 형의 잔소리와 다그침을 인내해야 했지만 덕분에 결석과 지각 없이 초등학교를 마쳤다. 지금은 형과 다른 학교를 다니게 되어 평화롭고 안온한 아침 시간을 즐기고 있다. 등교 시간이 다가와도 아무런 조바심 없이 마냥 침대에 누워 있다. 아침식사도 조식 뷔페처럼 여유롭게 즐긴다. 나는 5분 단위로 등교 시간을 리마인드 해주지만 결국 학교 문 닫히기 5분 전 출발이다. 신기한 것은 축지법을 쓰는지 자기 사전에 지각은 없단다. 시간을 초월해 신처럼 사는 둘째의 삶이 난 세상 부럽다.






셋째의 시간을 대하는 자세는 또 다르다. 노산으로 낳은 늦둥이라 체력적 한계도 있었고 이렇게 저렇게 내가 애를 써도 아이들은 모두 '타고난 기질'대로 살아가더라는 나름의 경험적 교훈(Lesson Learned)이 있는지라 웬만한 상황에서는 ‘정해진 시간도 없고 어때야 한다'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이의 바이오 리듬에 내 생활패턴을 맡겼다.

아이는 밤새 놀다가 해가 뜨면 자기도 했고,  정해진 식사 시간 없이 배고프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고자 나도 아이와 같이 먹고 잤다. 막내에게 정해진 시간이라는 것은 없었다. 시간의 진공상태라고나 할까.

막내 유치원 때는 해가 중천인 것도 모르고 함께 자다가 유치원 전화를 받고 뒤늦게 등교, 점심만 먹고 돌아온 적도 많다. 그래도 얼마 전부터는 학교 입학을 앞두고 가끔씩 이야기해 주었다. 초등학생이 되면 시간 속에 살아야 하는데 이제 학교에 가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다행히 등교 첫날 아침, 막내는 스스로 눈을 번쩍 뜨고 교복을 챙겨 입었다. 자기는 이제 학교 가야 할 시간이라면서. 막내의 '시간의 무질서'는 사실 나의 게으름의 결과였나 보다.  


내 일상에 세 아이의 시간이 모두 담겨 있다 보니 나의 하루는 뭐랄까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화 '메트릭스'의 가상현실 같다. 그나저나 누구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논하더구먼 나는 세 아이의 ‘등교시간’ 이야기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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