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관계
강경화 장관과 그의 남편 이야기가 온라인 매체와 소셜 네트워크에 넘쳐난다. 나는 진영 불문하고 개인사가 기사화 되거나 제삼자가 타인에 대해 악의적인 포스팅을 하면 의도적으로 무심한 편이다. 어쩌다 기사나 글에 낚이더라도 다 믿지는 않는다. 내막이 밝혀지면, 전후 사정을 알고 보면,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뉴스는 격하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나의 오감이 작동한다.
멋진 요트가 정박해 있는 태평양 푸른 바닷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짭조름한 바다 냄새, 들고 나는 파도 소리. 더없이 안온하고 평온한 이 순간 다급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초초하게 국제전화 통화 대기음을 듣고 있는 강 장관의 모습. 그러다가 뜬금없이 떠 오르는 나의 생각. '부부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 조건에 맞춰 결혼한 부부, 어쩌다 보니 부부, 떨어지면 하루도 견딜 수 없는 부부, 함께 사는 것이 고행인 부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부부, 서로의 목덜미와 발목을 잡는 부부, 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되어주는 부부 또는 족쇄와 멍에인 부부, 아무 갈등 없는 부부, 매일이 전쟁인 부부. 이 모든 것인 부부 또는 이 모든 것도 아닌 부부.
공직자로서 공무를 수행하는 외무부 장관, 은퇴 후 지극히 사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의 배우자. 코로나 시국 해외여행 자제 권고를 호소해야 하는 아내, 인생 버킷 리스트의 꿈을 안고 해외로 떠난 그의 남편. 공인과 개인 삶을 함께 해야 하는 이들 부부.
'부부'는 개인이 짝으로 만난 하나의 팀이자 운명 공동체이다. 하지만 제삼자에게는 여전히 내밀하고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결혼'은 사적 개인이 공적 사회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제도 안에서 상호 결속과 법적 구속력을 갖고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한다. ‘부부관계'는 사적이지만 '결혼제도’는 어느 면에서 공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혼이 공적 의무 영역은 아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와 같은 국민 4대 의무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개인의 권리이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득'이 되고 '덕'이 된다고 판단되는 파트너를 만나 결혼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사랑만으로 맺으로 결혼도 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고 따지다 보면 결혼 못하거나 안 하기 쉽다.
결혼 생활은 사랑으로 시동을 걸고 올라탄 바다 위 요트 여행과 같다. 여행의 시작은 그윽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샴페인 잔을 부딪히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이러한 로맨틱 여행이 계속될 것 같지만 몰아치는 바람과 거대한 파도를 버텨야 하는 날도 온다. 어떤 날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목적지를 향해 '조타'에 함께 손을 포갠다. 어떤 날은 소리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할 때도 있다. 자칫하면 조난을 당하거나 난파되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운이 좋으면 황혼의 석양을 함께 바라볼 수도 있다.
아무튼 불행하자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해피엔딩을 꿈꾸며 지도를 들고 여행을 시작한다. 하지만 지도에는 정확한 목적지가 없다. 인공지능 AI와 인공위성 GPS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요트 위 두 사람이 이성과 감성으로 지도를 그리고 직감으로 수정해 가면서 함께 나아갈 뿐이다.
행복하자고 시작한 결혼생활에 정답도 없다. 그래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방법은 있을까? 이 질문에 영국의 사상가 버틀란드 러셀(Bertland Russell)의 '결혼과 도덕(Marriage and Morals)'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문명사회의 남성과 여성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루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수많은 조건이 충족되어한다. 부부 쌍방이 완벽히 평등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자유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육체적, 정서적으로 완벽한 친밀감이 형성되어야 하고, 가치 기준이 어느 정도 일치해야 한다.'
러셀도 어지간히 결혼 생활에 대한 고민이 많았나 보다. 그의 생각이 실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더없이 이상적으로 들린다. 1929년 쓰인 이 대목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에게는 유효하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부부와 결혼을 생각하다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떠난 공직자 남편의 해외여행, 그리고 그의 요트 사랑'에 대한 기사와 말들이 다시 떠오른다. 타이밍이 문제였다. 그가 평생 기다려 왔던 순간에 대해 모두가 한마디씩 한다. 비난이 난무하기도 하고 쉴드의 반응도 있다. 사람은 모두 생각이 다르고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이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 사안에 대해 내 의견이 뭐 그리 중요하지도 비난과 쉴드를 보탤만한 입장도 아니다. 다만 기사의 타이밍에 아쉬움이 남는다. 공항에서 잠복하다 여행 가방 몇 개 들고 출국하는 장면보다는 ‘요트 타고 음주 운전하는 장면이나 마약 밀수하는 장면’ 정도는 포착했어야 했다.
타이밍이 아쉬우니 콘텐츠도 부실하다. 모르고 지나쳤어도 개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 차라리 몰랐더라면 더 좋았을 일이다. 사안에 대한 공격과 방어로 서로의 에너지가 소진되고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진다. 국민의 알 권리보다는 오히려 국민 정신 건강을 해친 기사다.
공직자 또는 그의 가족이 불법, 편법, 범죄에 연루되었을 때 또는 그러한 개연성이 있을 때 아니면 국익과 국격에 막대한 해를 끼쳤을 때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적 영역이 노출된 강 장관 부부의 당혹감, 이렇게라도 기사를 써야만 하는 기자의 자괴감, 두 감정이 모두 느껴진다. 내 코가 석자이지만 강경화 장관, 기자(기혼자라면) 부부 모두 행복한 결혼 생활하시기 바란다.